겨울 한낮에 집에서 쉬려고 하면
먼지가 슬슬 싸움을 걸어옵니다.
내가 일어나면 따라서 일어나고,
내가 누우면 따라서 눕습니다.
꽃들도 책들도 조금씩 먹어치웁니다.
움직이지 않고 있어도 주변을 서성거리며 지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싸울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편이었습니다.
어우러져 껴안고 춤출 사이였습니다.
흐느끼며 같이 무너질 우리 사이였습니다.
拙詩/ 싸움
방학 동안, 밝은 대낮에 집에 있어보니까 어색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번쩍이는 햇빛에 걸려든 사람들과 물건들은 남루하기 그지없습니다. 꼭 땡땡이 치고 일찍 집에 온 아이 같아 아주 안절부절 입니다.
그런데 집에 있어보니까 영 기분 나쁜 게 먼집니다. 한낮에 햇빛이 구석구석을 훤하게 비추면, 그 햇빛줄기에 너울거리는 먼지가 저하고 놀자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건방집니다. 세상이 온통 먼지, 저희들 세상 같습니다.
이불을 들고 밖에 나가서 팡팡 털어보기도 하고, 입던 옷도 벗어서 팍팍 털어서 입어보았지만, 그래도 먼지란 놈은 약 올리듯, 여봐란듯이 거실 한복판에서 블루스를 추고 있습니다. 청소기 강도를 최고로 높여 모조리 잡아넣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보았더니, 아아 귀신같이 살아남아 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아주 가지고 놉니다. 마치 먼지와 전쟁을 치르는 듯한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다 시간이 제법 흘러 보통 때의 퇴근 시간 무렵이 되니까 먼지는 서서히 후퇴합니다. 실은 후퇴를 한 게 아니고 내 눈이 먼지를 보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더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나는 먼지가 보이지 않을 무렵에 집에 들어왔단 말이 됩니다. 늘 먼지와 뒹굴고, 먼지를 껴안고 살면서도 먼지를 감쪽같이 눈치 채지 못하고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하기사 우리가 기껏 볼 수 있다는 건 사람의 허우대나 번들거리는 가구나 꽃의 색깔이나 그런 것들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낮에 있었던 먼지와의 전쟁을 밤에 다시 생각해 보니까 한참 모자라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우리가 먼지 덩어리가 아닙니까. 혹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먼지를 만드는 짓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먼지인 주제에 먼지를 턴다고 벌벌거리는 꼴을 보면서 먼지가 얼마나 웃었을까요. 주제 파악을 못하는 우리를 두고 먼지가 아주 깔깔거렸을 것입니다. 그 웃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나를 두고 저희들끼리 한참을 씹었을 것입니다.
[출처] 88. 먼지 만들기 (시산문(詩散門)) |작성자 날개
조향순 시인님의 '시를 위한 산문'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먼지를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요. 사람도 먼지로 이루어져 먼지로 돌아갈 것인데 털어낸다고 법석을 떨어 먼지들끼리 씹고 깔깔거렸을 거라는군요. 날개님, 그런데, 우리가 먼지덩어리라 해도 쌓이는 먼지를 털어내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먼지 정말 성가셔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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