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송재학

서해기린 2012. 6. 8. 16:58

 

 

[시가 있는 아침]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 떼 가득한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 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 송재학(1955~ )



 

          

                                                                                                                                                - 5월 어느 날 꽃담,에서 - 

 

 

몸 없는 그가 얼굴을 만지네. 그는 계곡물에 치자 향을 묻히며 잠결로 왔네.  내가 간절히 정신 놓으면 그는 불현듯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네. 그의 휘파람이 이승 쪽 출구를 포근히 잠그면, 밤도 낮도 아니며 꿈도 생시도 아닌 곳에서,

 

죽은 그와 몸 섞는 나는 결코 눈뜨고 싶지 않으리. 죽은 이를 여전히 사랑하는 죄로, 눈뜰 힘조차 없으리. 햇빛이

 

여기저기 기둥을 세웠다간 흩어지듯 나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울 수 있겠네. 나비 날개를 달고, 그 숨결에 이 숨결을

 

포개어 반드시 소리 죽여 울어야 하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때로 젖먹이처럼 때로 강아지처럼 나는 자꾸 돋아나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다네. 아무렴, 자꾸만 발돋움해서 그의 허공을 살처럼 만져볼 수도 있다네. <이영광·시인>

 

 

 [중앙일보] 입력 2012.06.08 00:00 / 수정 2012.06.08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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