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마른 들깻단/삽-정진규

서해기린 2012. 6. 22. 11:25

 

 

마른 들깻단/정진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짝이는 들깻내,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 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열매를 다 내어준 뒤 빈털터리가 되어 말라가는 들깻단과 늙은 아버지가 한 장면에 겹쳤다.

들깻단은 추수가 끝난 빈 밭에 버려져 있고, 아버지는 혼자서 기침 소리에 깨어 새벽잠을 설치고 있다.

늦가을을 맞은 들깻단도 아버지도 이제는 거죽만 남은 쭉정이 신세다.

하지만 잘 마른 들깻단엔 깨를 털기 전의 향기와는 또 다른 향기가 있다.

물기가 싹 가신 뒤의 들깨는 빈 몸에 서리를 맞아들여 고소한 열매들이 낼 수 없는 독특한 삶의 체취를 뿜어낸다.

 

 '반짝이는 들깻내', 몸과 마음을 비워나가는 그 맑고 가볍고 정갈한 말의 냄새야말로 인생의 참된 반짝임이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란 곧 노년을 늙고 병듦이 아닌 자연스런 완성으로 받아들여

인생이 인생다워지는 순간을 가리킨다.

가을 들판이 여윈다. 덤불의 기운이 꺾이면서 숲에 가려져 있던 작은 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빽빽하게 붙어 있던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도 여백이 늘고 있다. '다 털린' 저 빈 곳에 빨래라도 내다 걸듯

비린 습기들을 조금씩 말려볼 일이다.

바싹하게 잘 마른 들깻단은 불에 탈 때도 매운 연기를 내지 않고 불땀이 좋은 법이므로. 

- 손택수ㆍ시인. 한국일보.2008.11.11

 

 

 

우리 엄마도 마른들깻단을 쌓아놓았었다.

 들깨향은 다 털고 난 들깻단에서도 오래 남아있었고 들깨가 살아온 밭과 흙의 냄새와 엄마의 냄새까지 묻어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것이 잘 늙은 냄새였다는 걸 그때는 모르고 깻잎쌈보다는 옅지만 고향과 자연의 냄새를 낸다고 했었다.

저 단을 끝까지 엄마는 마당에 걸린 가마솥 밑 아궁이에 넣으며 빨래를 삶고 익모초를 우릴 때 장렬하게 장사지내 주었다.

밭에서 함께 한 시간들을, 한 해를 그렇게 사르며...

마른들깻단의 향기가 나도 좋다. 사무치게 좋다.   
 

 

 

 

 

 

 


 삽 - 정진규(1939~ )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만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 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나를 문질렀다



땅이 딱딱하게 앙다문 너의 입이라면 삽은 그걸 부드럽게 여는 내 입이다. 삽이 품은 입술소리(‘ㅂ’)는 “얌전하게 다물어” “거두어들이는” 소리지만, 삽은 이미 시원한 바람 속을 지나왔다. ‘사사삭’ 하고 풀밭에 뱀 지나가듯 네게로 드는 소리가 있다. 그 다음 뒤에서 닫히는 입술이 있다. 그렇게 너를 열면 그곳이 무덤이다. 너무 좋을 때에는 ‘에고 나 죽네’ 소리가 절로 난다. 서로의 몸을 더듬는 것, 그게 염()이다. 오늘도 내 마음의 곳간에 빛나는 삽 하나가 있다. 네게로 외삽(外揷)하고 싶은 마음 하나가 있다.

<권혁웅·시인> 중앙일보
 

 

 

삽, 참 예의바르고 정숙한 입모양으로 소리난다.

살아가는 것은 삽질이고 삽질은 끝없는 희망을 담은 행위이며 시도이다.

시도는 열매를 맺기도 하고 더러는 헛삽질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진실을 담고 있다.

요즘 내가 하는 몇가지 삽질이 있다.

삽, 삽, 사브작, 사부작……

이 예쁜 소리에 그것을 캐서 담고 싶다.

언젠가는 나도 마지막을  파고야 말겠지만

우선은 고운 삽질을 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