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은 몸이 더 보이지 않는다
정상미
낙엽비가 내린다. 바람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은행잎과 벚나무 잎들이 팔랑거리며 내린다. 떼 지어 나비들이 내려온다. 작고 붉은 물고기들이 배를 뒤집으며 내려온다. 우듬지는 이미 잘디잔 맨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저 비 그치면 앙상한 가지만 남아 나목으로 서 있을 나무들, 그때 나무는 제 색을 잃고 그냥 나무가 된다.
꽃으로 연두빛 새순으로, 초록 잎새와 단풍으로 우리의 마음을 설레고 행복하게 해 주던 나무들이다. 낙엽으로 우리를 쓸쓸하게 하던 나무들이다. 옷을 다 벗으면 은행나무도 벚나무도 그저 무채색의 나무일 뿐 저들의 잎이 노랬는지 붉었는지 부채꼴이었는지 아기 손가락 같았는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센트럴파크에 봄이 오고 있었다. 아직은 꽃샘바람이 불어 겉옷에 신경을 써야할 때지만 벚나무 가지마다 통통해진 꽃봉오리들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공원 담벼락에 길게 묶여 기대선 나무들이 보였다. 이파리 하나 입지 않은 맨몸은 가늘어서 어린 등나무처럼 보였고 마치 어디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뿌리는 인도에 박힌 채 허리쯤 되는 줄기와 윗부분은 담벼락으로 기울었다. 가슴팍에 납작한 쇠붙이를 붙이고 담에 바짝 고정돼 있었다.
포로가 된 나무들의 행렬은 길고 뭔가 잃어버린 듯 영혼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바닷바람이 만만찮게 불어서 체감온도는 주위 도시에 비해 조금 더 낮았지만 며칠 뒤 드디어 벚꽃이 피었다. 팝콘처럼 팡팡 터지는 꽃들 앞에서 여전히 나무들은 비리비리하게 말라서 기가 죽었고 담 쪽으로만 자라야 했다. 저 나무들은 담이 되었다가 난간을 잡고 올라가 작은 초롱들을 주렁주렁 달게 될까.
때맞춰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어린이가 지나간다.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으로 어깨가 축 처졌다. 이 학원 저 학원 부모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아이들이 담벼락에 기대선 나무들은 아니었을까.
공원에 연두가 퍼져갈 때 담벼락과 위쪽 쇠 울타리 난간에는 등꽃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기 시작했다. 바람의 온도가 여러 번 바뀌고 공원에는 초록이 무성해졌다. 포로들은 조금씩 이파리들을 달기 시작했고 이제 더 이상 포로 같지 않았다. 이파리들이 아무래도 등나무 같지는 않다 여겼을 때 어느 날 주홍색 초롱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꽃이 피었다. 능소화였다.
궁궐에만 갇혀 지내던 어느 궁녀의 애절한 사연을 담은 능소화, 담장을 타고 올라 드디어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꽃이다. 주홍색 초롱들이 일제히 불을 밝히자 담벼락은 금세 환해졌다. 난간을 잡고 하늘로 오르기도 하고 더 이상 잡을 것이 없으니 초롱들을 늘어뜨리기도 했다. 밤에도 빛나는 능소화, 공원은 더 북적거리고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빴다. 등나무로 여겼던 나무가 능소화라니! 갑자기 능소화에게 미안해졌다.
벗으면 잘 보일까? 벗겨 놓으면 다 똑같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잘 입고 잘 나고 똑똑하고 돈이 많은 사람도 목욕탕에서 보면 그 사람이 똑똑한지 어리숙한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알 수가 없다. 다 같은 그냥 사람인 것이다. 나무도 그렇다. 내가 나목일 때 보았던, 봄에 꽃이 피는 등나무로 알았던 나무는 여름에 피는 능소화였다.
벗은 나무들은 감추고 있다. 이파리의 모양을, 꽃의 빛깔과 무늬를. 나무가 이파리와 꽃, 열매로 옷을 입어야 비로소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처럼 사람도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 비로소 그 또는 그녀가 된다.
그 옷이란 그 사람의 눈빛, 목소리, 웃음, 말과 행동, 표정, 걸음걸이, 옷차림, 머리 모양 같은 것이다. 솜씨, 능력 같은 당장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다 수반되어야 그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시간을 가지고 오래 지켜보아야 알 수 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말과 행동, 표정은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은 저 깊숙한 곳에 살고 있어 더 헤아리기 어려우니 벗어야 잘 보인다고 말하지 마라. 벗은 몸이 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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