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이 서로 낯을 가리듯
서로의 얼굴을 가린 대문 앞, 택배아저씨가
기척도 없이 물건을 던지고 유령처럼 사라진다
너무나 조용하여 다읽지 못한 적막의 숨소리
휴지기에 들어간 성소는 지금 침묵을 번식 중이다
혓속에 갇힌 태초의 구음口音들
사랑이란 말들이 농밀하게 담겼을 입술을 가리고
사제들도 지저귀는 것이나 떠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책 넘기는 소리와 책상 무릎이 서로 부딪쳐
어둠의 난간을 붙들고 시간의 넓적다리가 녹는 중이다
경로를 벗어난 새들이 배회하는 봉쇄원
외로움의 극지에도 틈이 생긴 듯
사랑한다, 사랑한다, 한없이 길어지는 혀
영상 속 남자와 여자가 뜨겁게 포옹하고 있다
비대면 저쪽도 지금 고독을 탈피중인 듯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당신이겠지, 당신일 거야,
먼 데서 옮겨 심은 천리향이 홀로 흐느끼는
이곳은 밤낮 없는 고독의 서식지,
기척도 없이 누가 문밖을 왔다 떠나는지
발버둥치는 번개와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시집 『유채꽃 광장의 증언』
김현주 시인
전주 출생
칼빈신학대, 고려신학대 졸
2007년 『시선』등단
시집 『페르시안 석류』 『好好해줄게』 『유채꽃 광장의 증언』
숲속의 시인상, 매일 시니어문학상, 시인들이뽑은시인상 등 수상.
인천문화재단기금 수혜(2회)
E메일 : wine47@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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