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집 & 앤솔러지

광주문학아카데미1집, 《흘러내리는 기ㅡ억》2

서해기린 2021. 10. 11. 12:35

#광주문학아카데미1집
#흘러내리는기억 ㅡ소개 2


<박정호, 백애송, 염창권, 이송희 시인편>

♤♧
창작을 위한 협력적 공동체,

광주문학아카데미1집

《흘러내리는 기ㅡ억》이

출판사 '아꿈'에서 지난9월에 출간되었다.

처음엔 서로 글 읽어주는 독자로 서넛이다가 지금은 열 명 안팎이 모여 10년을 넘기고 있다는데 등단, 출간 등 축하할 일엔 축하해주며 합평회는 날카롭기보다는 우애로 잘 버텨왔다고, 혹평도 하지 않았지만 칭찬에도 인색했다고 염창권 시인은 문을 열며 말한다.

참여회원은 가나다 순으로 고성만, 김강호, 김화정, 박성민,박정호, 백애송, 염창권, 이송희, 이토록, 임성규, 정혜숙, 최양숙 시인으로 12명이다.

표제 <흘러내리는 기ㅡ억>은 이송희 시인의 시조 제목이다.

'광주문학아카데미'와 같은 창작을 위한 협력적 문학공동체는 얼마나 아름다운 모임인가? 십 년을 넘기며 밀고 당기고 서로 기대며 우애하며 문학 안에서 흐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향기로운 것이다.


♧신작

마음의 바깥 / 박정호


1.

바깥이 문제다. 바깥은 허술하다. 억지웃음으로 위장되어 있으나 쉽게 들키고 만다. 바깥이 불안하다. 불안은 먼 곳까지 포진하고 있다.

나는 안이고 세상은 바깥이다.
나무는 안이고 꽃은 바깥이다. 꽃은 피는 것이 아니라 터져 나온다. 부르는 곳은 안이고 오는 곳은 바깥이다. 그대는 안에서 오는가? 밖에서 오는가? 그런 곳 상관없이 너는 안이고 나는 바깥이다.

대체로 안팎이 바뀔 수 있으니 구분을 잘해야 한다.

2.

바깥은 적나라하다. 안에서 느슨해진 긴장의 볼트를 바짝 조여라.

잘 알고 있는 곳이라도 헤매기 마련인 길에서는 만나는 것들마다 인사를 해야 하므로 잘 차려 입어야 한다. 치장이 행세다. 넝마의 시간을 기워 놓은 만신창이 마음이야 흩어져 돌처럼 뒹굴거나 바람이나 물처럼 흘러 어느 자작나무 숲을 돌아가고 있을지라도 치부를 드러내어 얕보이면 안 된다. 때 낀 발목을 비단으로 가리고

나서라, 가열한 존재여 그럴싸하게, 진짜처럼.


♧신작

돌의 시간
-한재골에서 / 박정호


나는 돌이라 구르고 굴러 뛰는 돌
펄쩍! 뛰다가 어처구니로 처박혀
영마루 넘지 못하고 잊혀진 숨결이다.

구릉에 돌아앉아 다독이는 조각조각
팔매질한 어린 손아, 불구덩이나 꽃밭을 질러
은하수 건너다니는 떠돌이로 뒹구는 돌.

천변만화 구름길에 된비알 너덜겅에
물이 끓는지 피가 끓는지 할 수 없이 데굴데굴
주름진 돌의 시간을 씻고 있다. 식히고 있다.


♧신작

거짓말의 거짓말 / 백애송


저항에 대한 저항의,
저항의 최후가
거리에 쌓인다

한 줄기 눈물의 힘을
어디에 묻어야 할까

열여덟 의대생 청년과
열아홉의 태권소녀
산 채로 불길에 뛰어든 사람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연약한자들이 쏟아지는
작은 도시 양곤 아잉세잉구*‐

나침반은 강렬하게 흔들리고
세 손가락의 경례가
슬픔을 대신한다

아픔이 모이면 이룰 수 있을까

우리의, 우리가

*미얀마의 지명


♧발표작

시크릿 / 백애송


이건 비밀인데요
라고 시작된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전달해 달라는 이야기

세상에 비밀이 없다는 말은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다

어쩌다 돌고 돌아온 화살의 끝은
당신이 아니라 결국 나를 향한 것

혼잣말처럼 들리는
바람결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언제부터였을까
지켜야 하는 이야기에 날개를 단 것은

들어야 할 때와 말해야 할 때
듣지 말아야 할 때와
말을 아껴야 할 때

은근한 비밀보다
말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자오선을 그리며 비행한다


♧신작

그곳으로 돌아온 그는 / 염창권


문은 열려 있었다, 슬레이트 처마 밑에
그 풍경은 내색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억은 목이 쉬었다, 넌 올 줄 알았다고

빗장 풀린 길 안쪽에 또 길이 있었다
그곳에서 발원한 두 강물이 곧 닿았다
가을의 혈관 속에서 풀냄새가 흩어졌다

멈춰선 건, 그의 발이 아니라 의지였듯
길바닥에 흘리고 온 발자국은 멀어졌다
구두를 벗은 말들이 씨앗처럼 쏟아졌다


♧발표작

객석 / 염창권


은색의 박막 위에 벗은 살이 비렸다 방사된 몸통 아래
시간의 늑흔勒痕 같은, 질환이 퍼렇게 날인되자

야생의 몸 들끓었다


♧신작


테이크아웃해 주세요 / 이송희


함께 나눈 말들이 소복소복 쌓였어

틈새를 벌리고 불어넣은 바람들

달콤한 위로 몇 개도 고명으로 얹었어


아무도 모르는 사이 번져가는 소문은

적당히 버무려서 두서없이 담았지

그들은 간을 맞추며 울다 웃길 반복했어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표정을 바꿔야 해

민낯 가릴 휘핑크림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아

어느새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 담겼어


밖으로 흘러넘치는 울음을 덮느라

서로의 안부를 우린 힘껏 끌어당겼지

포장된 도로 위에는 낯선 표정이 즐비했지


♧발표작

흘러내리는 기억
-달리의 그림, <시간의 지속> 을 보고 / 이송희


우리의 시간은 흘러내리고 있었어

여전히 절벽 너머는 보이지 않았지만

잘 섞인 어제와 내일은 말랑하고 부드러웠지


눈 녹듯 녹아내리는 유년의 해변가

모서리에 부딪혀 멍든 꿈이 떠다녔지

뒤틀린 눈 코 입들이 무의식을 채웠어


째깍이는 죽음에서 걸어 나온 그림자

형의 얼굴 지우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페르소나가 당신으로 앉아 있어


기억은 돌아갈 수 없는, 나를 불러 세웠지

나무에 매달린 채로 눈 감은
수평선

어둠이 부풀기 전에 아침이 오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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