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남신의주 류동 박시봉방)/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피잉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白石-
신경림 시인은, 중학교 시절 <학풍>이란 어려운 잡지에서 이 시를 보고,
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충격에 빠져
본 시를 제외한 다른 것은 단 한 쪽도 알아볼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책을 샀다고 한다.
그 바람에 같이 살던 형들이며 당숙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고...
그 후로 어려울 때마다 이 시가 큰 힘이 되었다고 그의 저서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에서 회고한다.
위 시가 발표된 것이 1948년이라고 하니 그 무렵에는 백석이 아니더라도
시대적으로 해방후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을 둘러싼 암울한 현실속 뭇 젊은이들의 마음이
그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습내 나는 방에서 외롭고 힘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때
세상은 마음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높은 어떤 것이 있어 나를 굴려간다 생각하니
차츰 차분해지고 앙금이 가라앉고......
하이야니 눈을 맞고 선 갈매나무와 자신을 동일시했을 때 비로소 편해졌던 백석은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눈을 맞으며 서 있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로 내 마음에 남는다.
그런데 갈매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글을 잘 쓰는 친구가 추천한 시집이 미당과 백석의 전집이었다.
두터운 백석전집을 한차례 훅 훑을 때는 그리 좋은 지 몰랐는데
요즘 다시 보니 마음을 잡아두는 옥석같은 시가 많다.
그 중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에 자꾸 끌린다.
후자의 시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한다.
아래 사진으로 보니 백석 시인이 참 잘 생겼다.
그래서인지 사후에 인정받고 인기를 얻은 여타 시인들에 비해 활동시부터 이미
인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백석 (백기행) 시인
- 생몰 : 1912년 7월 1일 ~ 1995년 (향년 83세) | 쥐띠, 게자리
- 데뷔 : 1935년 조선일보 시 '정주성(定州城)' 발표
- 학력 :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교 졸업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북방 정서를 통해 시화(詩化)했다. 본명은 기행(夔行).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의 〈고요한 돈 강〉 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이용악 시의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이후 남한에서 시집 〈백석 시전집〉(1987)과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등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