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시인의 일은 다른 이의 마음을 쓰다듬는 것. 그러나 수십 편의 시를 읽어도 끝내 추스를 수 없는 마음도 있지.
그런 적 있었지. 내 마음을 내가 해명할 수 없는 그런 때. 언어가 겨우 감당할 수 있는 표현은 ‘쓸쓸하다’ 정도겠지.
그런데 이 ‘쓸쓸하다’는 내 마음 상태를 온전히 증언하는 걸까.
착각이었지. ‘쓸쓸하다’는 마음 상태를 증언하는 형용사가 아니었던 게지.
김선우 시인이 얼마 전 내놓은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에서 그 비의(秘意)를 깨쳤지.
시인이 가르쳐준 ‘쓸쓸하다’의 비의는 이런 것.
쓸쓸하다,를 동사로 여기는 부족을 찾아 평생을 유랑하는 시인들
유랑이 끝날 때 시인의 묘비가 하나씩 늘어난다’
쓸쓸하다- 그림자의 사전3 / 김선우
마음이란 그런 것이지.
매 순간 흔들리고 매 순간 위태롭지.
쓸쓸함이란, 어지럽게 움직이는 마음이지.
그러므로 시인이란, ‘쓸쓸하다,를 동사로 여기는 부족을’ 치유하는 마음의 의료진.
평생 남의 마음을 치유하느라 유랑하고, 때로는 대신 아프고 대신 괴로운 이들.
그 고된 유랑이 끝나고서야 시인은 비로소 잠들지.
의료진에 전공의가 따로 있듯, 시인에게도 전문 분야가 있지.
김선우는, 이를테면, 여(女)와 여(餘)의 전공 시인. 여성의 고유성을 보드랍게 보살피고,
사회적 소수파의 목소리를 헌걸차게 담아내지.
…
누구도 ‘여’에 속하고 싶지 않지만 대다수는 ‘여’가 될 수밖에 없는 산술법을 태생으로 가진 무엇인가의 뱃속, 우리는 컴컴하게 처박힌 것 같은데
‘여’에게 /김선우
대다수의 ‘여(餘)’는 태생으로 ‘주(主)’인 이들에게 컴컴하게 처박히지.
누구도 ‘여’를 자원한 적은 없는데, 세상이 그렇게 정해버렸지.
‘‘여’에 속한 것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세상에서, 시인은 ‘여’를 찾아 유랑하지.
시인이 아니었다면, 겨우 살아남은 것들의 목소리는 누가 담아낼까.
여자가 만들었다면 이 기계는 따뜻해졌을 텐데 최소한 예열 정도는 되게 만들었을 텐데 그리 어려운 기술도 아닐 텐데
하이파이브 / 김선우
‘여’를 찾는 시인의 유랑은 이곳에서 멈칫 했지.
산부인과에서 시인의 다리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차가운 기계. 시인은 간호사에게 물었지.
‘이 기계 말이죠 따뜻하게 만들면 좋지 않겠어요?’ 처음 본 간호사에게 한마디 한 순간 손바닥이 짝 마주쳤지.
오래도록 여(餘)에 속한 여(女)의 경쾌한 연대감. 다 알 순 없어도, 둔한 남성 독자도 마음이 움직였지.
여(餘)인 여(女)에게 염치 없는 손바닥을 내밀고 싶어졌지. 하이파이브!
금세 삐죽이 올라오더니 봉오리가 맺히고 이렇게 피었네요.
햇빛이 따사로운 날 피어난 지 하루도 안되어 다 벌어지고 말았어요.
김선우 시인, 소설가
1970년 강릉에서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사,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작과비평사, 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와 산문집『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작과비평사, 2002) ,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등과 그 밖의 저서로 전래동화『바리공주』와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실천문학사, 2008)가 있음.
2004년 ‘현대문학상, 2007년 제9회 '천상병시상' 과 이육사문학상
그리고 2008년 한국여성문예원 선정 제1회 '올해의 작가상'과
제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 賞 수상. 현재 '시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