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에 물어 보라/눈의 무게...송재학
튤립에 물어 보라
지금도 모차르트 때문에
튤립을 사는 사람이 있다
튤립, 어린 날 미술 시간에 처음 피었던 꽃
죽은 친구 대신 책상을 지키던 꽃
튤립이 소리를 가진다면 모차르트다
내 사춘기도 그 꽃으로부터 나왔다
그때 낡은 야전 전축으로 새 판을 틀었다
튤립은 밤 바다에 불빛을 걸치는 등대,
둥근 불빛이 내 입으로도 들어왔다
몸 안의 긴 해안선에서 병이 시작되었다
사춘기는 그 외래종의 모가지를 꺽기도 했지만
내가 걷던 휘어진 길이
모차르트처럼 구석구석 죄다 환했던 기억
……튤립에 물어 보라
<제10회 1996년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천양희 · 단추를 채우면서" (문학사상사) 에서>
눈의 무게
느티나무 가지에 앉은 눈의 무게는 나무가 가진 갓맑음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느티나무가 입은 저 흰 옷이야말로 나무의 영혼이다. 밤새 느티나무에 앉은 눈은 저음부를
담당한 악기이다. 그대 잠깐 햇빛이 따뜻하다면 도레미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도 보일 게다.
※ 송재학 시인
1955~ 경북 영천 출생, 경북대 치과대학을 졸업.
1986년 『세계의문학』에 「어두운 날짜를 스쳐서」를 발표하며 등단
감성의 미학이 아니라 사유의 미학을 가진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세속적 관계의 우수와 그 극복을 다룬 『얼음시집』(1988),
소리의 굴곡과 공기의 파동 및 꽃 그림자 등으로 이뤄진 『푸른빛과 싸우다』(1994),
색깔에 대한 독창적 해석과 일상에 대한 따뜻한 이해가 담긴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1997),
응축된 표현을 통해 사유와 직관을 담아내는 『기억들』(2001), 『진흙얼굴』(2005) 등을 간행한 바 있다.
그의 시 세계는 양감이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를 통해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