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사랑하는 것들/임창아
낮은 곳으로 기우뚱, 접는 물새의 날개
물새의 물무늬 쫓는 물뱀의 곡선
곡선이 더 선명해지는 화분의 깻잎
곁잎 따 준 자리에 생긴 어린 순
당신이 ‘여기까지만’ 하고 끊은 간밤의 전화
전화기에서 소곤대는 어제의 별
별처럼 반짝이는 읽다 만 페이지의 붉은 밑줄
졸립다고 벗은 돋보기, 그 돋보기 너머의 고딕체
예고 없이 쏟아지는 오후의 소나기
소나기에 놀라 덜컹거리는 창문
그 창밖 너머 빗속의 하염없는 당신
당신의 울음과 닮은 비의 하나뿐인 창법
크다 만 끝물 오이로 담근 소박이김치
김치가 시가 될 때까지 싸워야 할 모호한 정념
정념에 대해 긁적거린 어느 날의 강의 노트
노트북 열자 창을 물들이는 남해의 일몰
오후에 사랑하는 것들/ 임창아
- 계간《시인세계》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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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오후에 사랑하는 것들’은 높은 단계의 감성과 지성이 교직하여 작성된 품목들이다. 얼핏 사소하고 생소해 보이지만 마이크로 소프트한 예각이 장착되지 않고는 찾아내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마치 뷰파인더를 통한 섬세한 관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에게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이라든가 열심히 일한 남편이 벗어놓은 와이셔츠 깃에 묻은 땀 냄새 등 기 출시된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들이다.
차 한 잔 생각날 때 때마침 자판기커피를 건네는 동료의 손, 방금 포장을 뜯은 새 스타킹을 신은 종아리, 생각지도 않은 친구의 느닷없는 안부 문자, 선한 댓글, 화장실에서의 좋은 읽을거리, 문득 차안에서 FM라디오를 통해 듣는 추억의 노래, 늦가을 수북 낙엽 쌓인 길, 길게 찢은 김장 김치와 크게 벌린 어머니의 입, 작년에 입었던 겨울옷 주머니에서 발견한 돌돌 말린 오천 원짜리 한 장은 이 시에 비하면 아주 평범한 장르에 해당한다.
그러나 임창아 시인의 감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후에 사랑하는 것들은 더 있다. 대둔산 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는 골안개의 느릿한 비행, 베란다 화분에 앙증맞은 입술처럼 벌린 꽃그린의 개화, 목소리만 들어도 공연히 즐거운 반가운 사람의 전화, 어느 날 후딱 지나가는 시상을 메모한 포스트 잇, 종신서원을 마치고 나오며 활짝 웃는 수녀님의 환한 얼굴.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나중에 다시 만나…." 우연히 다시 보게 된 고 장영희 교수의 유언까지도 사랑하지만, ‘예고 없이 쏟아지는 오후의 소나기’ ‘소나기에 놀라 덜컹거리는 창문’ ‘그 창밖 너머 빗속의 하염없는 당신’ ‘당신의 울음과 닮은 비의 하나뿐인 창법’까지 사랑하려면 내 감성사전의 언어로는 턱없이 부족함을 느낀다.
권순진/시인, 칼럼니스트
(사진출처 : 너나들이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