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가득 찬 책 / 강기원
내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 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처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魚) 지느러미
강기원 -2006년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
강기원 시인
195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세계사,2005)와 『바다로 가득 찬 책』(민음사,2006)이 있다.
2006년 제25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강기원 시인의 시 한편을 추가로 올립니다. 바다로 가득 찬 책, 저는 이 시가 무척 마음에 드네요. 시인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까 생각해 봅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다를 소재로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