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문학공원과 옛집
지난 수요일 원주 박경리 문학공원에 문학기행차 다녀왔다.
원주 단구동 박경리 선생의 옛집은 [토지]의 영원한 산실이자 고향이다.
한국 근대사를 수려한 필체로 그린 대하소설 《토지》를 통해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소설가 박경리가 2008년 5월 5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주는
1980년부터 박경리가 정착하여 《토지》 4, 5부를 집필한 박경리의 삶과 문학 혼이
깃든 고향이다. 박경리문학공원은 2008년 8월 15일부터 토지문학공원에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토지》 속의 주요 배경을 테마 공원으로 조성해 작가의 문학 세계를
탐방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공원 내에는 단구동 옛집과 작가가 직접 가꾸었던 텃밭이 있으며 전시관으로 이용되는
2층 건물의 관리사무소 앞에는 경남 하동의 평사리 들녘을 연상할 수 있는 평사리 마당을
조성하였고, 옛집 위쪽으로는 홍이동산, 그 아래로 멀리 간도 용정의 벌판을 연상하게
하는 용두레벌을 조성하여 답사객들이 작품과 작가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용두레벌에 해당하는 곳을 가고 있다.
역시 용두레벌에 해당
박경리문학공원 앞에는 토지의 등장인물들에게 보내는
편지쓰기 대회에서 수상한 작품들이 걸개로 걸려있다.
고추를 다듬는 이 사진은 평소 박경리선생의 가장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어느 사진 작가가 찍은 것이라 한다.
박경리 문학의 집에는 유품과 사진들이 전시돼 있고 , 영상자료실이 있다.
박경리 선생은 경남 통영에서 1926년 본명 박금이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진주로 옮겨 명문 진주여고를 졸업했다.
여고졸업후 일본에서 유학한 남편과 결혼해 남편의 직장인 인천에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딸과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듯 했으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6.25로 부당하게 남편을 잃고(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국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행방불명)
아들마저 교통사고로 여덟살에 잃는 참척의 아픔을 겪는다.
김동리 선생을 만나 이름을 금이에서 경리로 바꾸고 (김동리 선생이 지어준 이름이라고도 한다)
1955년 김동리 선생의 추천을 받아 단편소설 《계산(計算)》과 ,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정식 데뷔한다.
처음에 박경리는 시를 좋아하고 썼으나 김동리 선생이 소설쪽이 나은 것 같으니
소설을 써 보라고 권했다 한다.
글을 써서 먹고 살 수밖에 없는 결핍된 삶에서 [성녀와 마녀], [내 마음은 호수], [푸른 은하],
[김약국의 딸들], [노을진 들녘], [가을에 온 여인], [재혼의 조건], [시장과 전장], [파시], [토지] 등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만일 선생의 삶이 윤택했더라면 훌륭한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선생 자신도 자신의 삶이 순탄했더라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고 하니 말이다.
[토지]의 복잡한 등장인물 관계도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 6월부터 1994년 8월까지 장장 26년에 걸쳐 집필하고
완성되었다. 5부 21권(나남 출판사) 분량의 대하소설이며 여러 비평가들로부터
한국문단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4대에 걸친 최참판과 그의 딸 서희와 주변을 둘러싼 얘기로 갑오년 동학 농민혁명과
갑오개혁등이 지나간 1897년 한가위로부터 광복의 기쁨을 맛본 1945년 8월 15일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경남 하동 평사리라는 전형적인 한국농촌을 비롯하여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부산, 진주 등에 걸치는 광활한 국내외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했다.
[토지]는 원고지 3만매가 넘는 분량의 역작이며 최참판과
그의 딸 '서희'의 4대에 걸친(1897 한가위~1945. 8.15) 역사와 운명의 대서사시로 한국인의 삶의 터전과
그 속에서 개성적인 인물들의 다양한 운명적 삶과 고난, 의지가 민족적 삶으로 확대된 한국의 수작秀作이다.
[토지]는 TV극으로도 세 차례 제작 방영되었는데 서희역은 한혜숙, 최수지, 김현주가 했다.
박경리 선생은 세번 째 서희역을 맡았던 김현주가 길상역의 유준상과 함께 가장 서희역에
가까웠다고 회고했다.
원주 단구동에는 딸 영주씨 때문에 오게 되었다.
딸 영주씨가 민주화투쟁을 하던 남편 김지하의 오랜 감옥생활과 관련해 시댁인
원주로 오면서 박경리 선생도 서울에서 딸을 돕고자 이사해 꾸민 새 보금자리이다.
서울에서 [토지] 1,2,3부를 쓰고 원주에서 텃밭을 일구며 [토지] 4,5부를 완성(1994.8.15)했다.
어머니와 박경리 선생
(선생의 이마에 조명등이 비쳐서 죄송~)
왼쪽에서 세번 째가 박경리 선생이다.
박경리 선생의 젊은 모습-사진을 찍을 때 관람객들이 비쳐서 이상한 사진이 돼 버렸다.
딸 영주씨와 박경리 선생
선생은 힘이 들 때마다 사마천을 생각하며 이겨냈다고 한다.
문정희 시인도 사마천에게 보내는 시를 쓰기도 했는데
사마천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구석이 많은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선생의 손자이자 김지하 시인의 아들 원보씨.
선생은 사위의 긴 옥살이로 8년동안이나 아빠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라는
손자가 가여워 많이 업어주었다고 한다.
손녀는 사위의 오랜 수감생활이 끝나고 얻어서 손자와 터울이 너무 많이 난다고 한다.
결혼식 당시의 모습
여고시절-왼쪽
인천에서 살던 단란한 한 때, 아들의 돌 때 찍은 사진이라 한다.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고
모진 세월 가고
늙어서 편안하고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고 했다.
단구동 옛집으로 이동
단구동 옛집 텃밭에서 일하다 호미와 책을 옆에 놓고
바위에 앉아 고양이와 잠깐 쉬는 모습(조각 심정수 2009)
손자들 놀라고 만든 연못
작년 여름 손자들이 대야에 물을 떠 놓고 물놀이를 했을 때
그 애들을 위해 연못 겸 풀장 같은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작정을 했기에
날이 풀리자 마자 일꾼들을 불러와서 거실 앞에 지름 3~4m쯤 되는 사발
모양의 연못을 팠는데 형태가 잡힌 뒤부터 나 혼자 매일 찌그러진 모자를
쓰고 작업을 하였다. 청석을 연못 둘레와 바닥에 붙이는 작업이었다.
어찌나 그 일이 즐거웠던지 아침 일찍이 해 저무는지도 모르게,
덕분에 손은 코끼리가죽같이 되어버렸지만.
여기서 글을 썼고
생전에 쓰시던 펜과 친필 원고지이며
범띠라고 누가 선물해 준 호랑이 모양의 장식품이라고 한다.
글 쓰던 방 옆에 있는 공간이다.
2층 벽에 도배된 선생과 관련한 출판물들
손자 원보씨 딸 영주씨, 사위 김지하씨가 보인다.
딸의 모습이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과 흡사하다.
집필실에서 밖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눈 먼 말
글기둥 하나 잡고
나 반 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 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선생은 재봉틀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차이나 칼라를 좋아했고
품은 허리선이 없는 통 원피스식이었다.
직접 조각한 여인상도 있었고 손수 만든 옷도 전시돼 있었지만 미처 찍지 못했다.
미장원에 다니지도 않고 모임에도 나가지 않은 채 오로지 글만 썼는데
글 쓰는 작업이 워낙 힘들어서 소설이 완성되면 두 번 다시 읽지 않았다고 한다.
글기둥 하나 잡고 눈 먼 말로 살다 가신 선생의 인생역정은 [토지]의 주인공들처럼 모질고 험난했지만 각고의 인내, 용기와 집념으로 완성해 낸 대서사시, 한국 문학사에 영원히 기록될 [토지]는 우리 민족의 아픈 근현대사를 보여주며 선생님의 숨결과 함께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선생의 단구동 옛집 조각상을 중심으로 기념샷, 중앙에 선생의 조각상이 있고 맨 뒷줄 청일점 장하빈 시인 옆 검은 옷이 산그림자다. 박경리/ 소설가, 전교수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을 《현대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단편 《전도(剪刀)》 《불신시대(不信時代)》
《벽지(僻地)》 등을 발표하고, 이어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波市)》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6월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에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 《토지(土地)》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영어·일본어·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호평을 받았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수상하였고,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그밖의 주요작품에 《나비와 엉겅퀴》 《영원의 반려》 《단층(單層)》 《노을진 들녘》
《신교수의 부인》 등이 있고, 시집에 《못 떠나는 배》가 있다.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되었으며 시인 김지하가 사위이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2008년에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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