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김 훈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중략>
물 빠진 갯벌은 '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서정주 <격포우중>에서)와도 같이
젖어서 질퍽거린다. 먼 것들로부터의 기별은 젖은 뻘 속에서 질척거리면서 저녁의 빛으로 사윈다.
<중략>
가을은 칼로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 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그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은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는 속수무책이다.
<하략>
김 훈 에세이 <바다의 기별>중에서
책정리를 하다가 튀어나온, A4 용지에 적혀 반으로 접혀 있는 이 글들은
수업 시간을 잘못 알아 너무 일찍 도착했던 어느 날,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렀던 도서관에서 읽은 책 속 내용입니다. 그때 이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사랑을 이렇게도 정의하는구나, 하며 메모해 두었더랬죠. 지금
보니 어느 옛시간 추억의 한토막을 만난 듯 반갑네요.
11월입니다.
은행나무도 벚나무, 단풍나무도 이미 노랗거나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을
부지런히 내려놓는 때입니다. 떠나려는 가을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은 거리로 공원으로 산으로 나가도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