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刻)/조경선
각(刻)/조경선
1.
꽃은 피는데 내가 살지 않은 봄이 온다
나는 지상에서 나무 깎는 노인
나무들은 우뚝 나무로만 서서 한 생을 탕진하는데
우듬지만이 까마득하다
둥지 잃은 새들이 잘린 그루터기에 맴돌아도
나무가 나에게 걸어오는 시간 따윈 묻지 않는다
저 깊숙한 울음까지 새길 수 있을까
환지통을 참으며 나무가 말라갈 때
바람이 무딘 손금을 부추긴다
나무가 모르는 방향에서 칼을 고른다
첫 날(刀)은 표피만 살짝 건드려야 한다
작은 숨소리만 들려도 칼을 뱉어내니
이겨내선 안 된다
무중력 상태까지 나를 놀치며 결을 따라 흘러야 한다
깎아내면 깎아 낼 수록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나무의 본색(本色)
그때 나무가 칼을 선택한다
살을 내주며 나무가 나를 길들인다
모르는 형상(形象)안에 칼은 갇히고
끝내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다
나무의 얼굴을 꺼내며 없는 봄을 탕진한다
2.
잘려나간 밑동이 다시 잘려 나간다
내력이 둥글게 말리고
날을 삼킨 결이 암호로 풀어진다
또 한 생을 절단 내는 순간이 온 것이다
오래된 내 상처가 목장갑 안쪽에서 꿈틀대기 시작 한다
관을 주문 한 자가 죽어서 관을 기다린다
그가 말한 먼 훗날은 그리 먼 때가 아니었다
먹선을 튕기면 끌은 정교해지고 망치는 거세진다
나무속을 파 내는 일이란 불편을 깎아내는 일
그의 체온과 진지한 몸짓을 생각하며 틀을 짠다
막무가내로 박혀 있던 울음소리를 걷어낸다
수십 겹의 울음이 뭉쳐져 있다가 풀어진다
그에게 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백엔
울음따윈 없어야 한다
겨우 여섯개의 판자가 생을 요약한다
뚜껑을 만들기 전 숨을 고른다
관을 닫을 때 어둠이 눌리지 않아야 한다
가만히 관에 누워 본다
완전한 처음, '내 나무'의 완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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