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봄/이성부

서해기린 2017. 2. 14. 15:52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급할수록 더디다. 지쳐 숨이 넘어갈 때쯤, 마침내 올 것은 온다, 더디게 더디게. 그것이 봄이다. 오면, 봄이 오면, 눈부셔 맞이할 수 없고, 소리가 굳어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 새날, 새봄은 그렇게 온다. 나의 봄도 너의 봄도, 서울만의 봄도 평양만의 봄도 아니다. 우리 모두의 봄이어야 한다. 봄이 오면 겨울은 망하는가. 그렇지 않다. 봄은 그 겨울에조차 봄인 봄이다. 겨울이 깊이 묻어둔 씨앗에조차 움을 틔우는 봄이어야 한다. 블랙리스트에, 핵미사일에 사드까지 으스스한 봄은 비참하다. 언제까지 온 민족이 살상무기 공방의 볼모가 되어야 하나. 1974년의 작품. 40년도 더 전의 시를 마치 오늘의 것인 양 읽게 되는 심정이 기구하다.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봄

 

 

 

                                                                                                                 장복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