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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간격 / 홍계숙
서해기린
2021. 2. 3. 00:14
겨울나무 그림자는 간격을 재는 줄자
천년을 한 자리에 묶여 사는 나무들은 제 키를 알고 있지 한겨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걸으면 볼 수 있네
체중이 가벼워진 나무는 발치에서 미끈한 줄자를 꺼내어
앙상한 우듬지 빈 둥지와 저쪽 둥지와의 간격을, 굴참나무 껍질 속 사슴벌레들 겨울잠과 봄의 간격을,
가로수 길을 걷는 연인들 입술의 간격을
차가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체온까지 재고 있는 것을
종종걸음 햇살에 제 키를 맞추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줄자를 늘였다 당기며
너에게서 나에게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슬금슬금 아침에서 저녁까지
해마다 나무의 키가 쑥쑥 자라는 건 그 줄자 때문이지 뒤꿈치를 들고 온종일 하늘바라기에 겨울 해가 저무는
겨울은 당신과 나의 간격을 재기에도 좋은 계절,
너무 벌어져 춥거나
너무 가까워 찔리지 않도록
지금 겨울나무는
찬바람과 꽃눈의 간격을 측량중이지
-시집 '다정한 간격'
2020년 10월. 책나무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