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집

거긴 여기서 멀다

서해기린 2022. 7. 1. 22:15

흠결 없는 문장은 읽기도 전에 사라진다
시효가 지극히 짧은 아름다운 꽃의 서체

이제 나 어디로 가랴
꽃이 저리 지는데


한뼘 남은 햇살이 서녘에 위태롭고
한지에 먹물 스미듯 어둠이 번진다

끝까지 와버렸구나
어디에도 없는 다정


바람 앞에 맨몸으로 뒹구는 생이 있어
당신은 이마를 짚어 그 생을 좇아간다

후미진 골목 끝에서
근조등이 흔들린다


어디에도 없는 다정 / 정혜숙

ㅡ《거긴 여기서 멀다》

우체국에서 오늘 받은 참외와 체리자두를 딸에게 택배로 붙이고 공원의 그늘이 시원해서 쉬고 있다. 장마 그치고 바람은 살랑살랑, 더없이 맑은 하늘이 선물 같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정혜숙 시인의 시조집 《거긴 여기서 멀다》이다. 감사히 읽는다. 도서관으로 갈까 했는데 바닷물이 들어오는지 바람이 상쾌하고 마스크를 쓰기 싫어 그만 두기로 한다.

♤♧

초서체의 문장을 천천히 따라가요
맑고 아름다운 나비의 홑겹 노래
읽힐 듯 읽히지 않는
쓸쓸한 비문秘文이죠

나비를 부축하는 바람의 행려와
무릎에 고개를 묻은 초로의 저 남자
마음이 출구를 잃어
안개 속에 갇혀요

서풍의 갈피에 희미한 울음 몇 올
꽃의 이마 쓰다듬는 봄의 미간 어두워요
누구나 세상에 와서
조금씩 울다 가죠

나비의 문장을 읽어요 / 정혜숙

♧♤


'어디에도 없는 다정'과 '나비의 문장을 읽어요' 두 편을 골라 적으며 나를 더 붙잡아 두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만 한번 더 적어 본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끝까지 와버렸구나
어디에도 없는 다정"

"누구나 세상에 와서
조금씩 울다 가죠"

이 두 문장만으로 여러 날 가슴이 꽉 찰 것이다.

(어릴적 내 고향에는 정혜숙이란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집안의 먼 친척이기도 한 그 친구는 서울에서 산다는데 동창회에 나오지 않아 보기가 힘들다. 시인의 이름과 같아서 혜숙이 생각이 났다. )

♤♧
어제와 오늘 고마운 분들이 이것저것 보내주셨다. 마음도 부르고 배도 부르다. 감사하다. 소장하신 각기 다른 시인의 시집 두 권을 보내주신 선생님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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