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시계들의 소풍/우경주

서해기린 2011. 9. 18. 22:55

 

 

 

 

 

 

달리*의 시계들이 소풍을 나온다

평생 기대어 서 있느라 허리 휜 시계들

오늘은 가벼운 차림으로 푸른 하늘 머리에 이고

창으로만 내다보던 세상으로 걸어나온다

납작한 몸 반쯤 꺾어본 후

넓은 바다를 눈 속에 넣으며 모래 위를 달리고

파도를 걷어차 하얗게 구겨 놓기도 한다

잎새 떨군 나무에 겉옷이 되어주고

출생을 짐작할 수 없는 물체위에 앉아보면

탁자위에서 눈 녹듯 흘러내리고 싶어진다

흘러흘러 바다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애초부터 말랑말랑한,

연체동물이었는지 모른다

사각의 벽에 갇혀 다른 이의 일상을

끌어당기며 밀고 가던 고된 삶

나는 저 시계의 성화에 눈 부비며 일어나

얼마나 많은 아침을 쪼였을까

너울에 감겨 소리 아득하게 들려도

고집스런 저 목소리가 밉지 않다

이제는 파도소리 자장가삼아 푹 쉬고 싶다고,

기약 할 수 없는 앞날을 향하여

마냥 달리기가 불안하다고,

시간 멈추어 놓고 월담한 시계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나뭇가지에 걸린 시간과 모서리에 접혔던 시간들이

고삐를 풀고 화폭 속에서 걸어나온다

 

 - 우경주 -

 

*달리: (1904~89)초현실주의 대표화가. 대표작품<기억의 연속성>에 나오는 시계

 

 

 

* 위 시는 올해 방송대문학상 대상을 차지한 작품이다.

 

 

 
시 부문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이십여명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수준이어서 우열을 가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 중에서 우경주, 이태정, 박순남, 이선자, 강나현 등의 작품이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게 되었다. 이 다섯 분의 시는 저마다 개성적인 스타일과 안정된 호흡을 지니고 있어서 누가 수상을 해도 무방한 것처럼 보였다.

 

  고심 끝에 상대적으로 새로운 발상과 어법을 보여주는 우경주의 <시계들의 소풍>을 당선작으로, 이태정의 <사파리 파크>를 가작으로 선정했다. 시적인 상투성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가 결국 판단의 관건으로 작용했다는 뜻이다.

우경주의 <시계들의 소풍>은 달리의 그림을 모티브로 삼아 시간에 대한 사유를 신축성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내용을 단순히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시간에 새로운 육체성을 부여하는 형상력이 돋보였다. 그의 다른 시 <페이지 터너>나 <손가락 끈>등도 “그늘의 존재”들을 구체적으로 그리면서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있다.

 

  그에 비하면 이태정의 시들은 한결 발랄하고 경쾌하다.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보여주면서도 구어체의 발성을 통해 무겁지 않은 풍자를 이끌어 낸다. <사파리 파크>는 대형마트를 사파리 파크에 비유함으로써 소비사회의 단면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고, <초원의 본성>은 가족을 둘러싼 이기주의를 기린에 빗대고 있다.

 

  박순남의 시들은 감각적인 언어와 속도감있는 문장으로 부조리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진술적 문장과 이미지의 비약이 시적 형상화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길이의 산문시 형식에 갇히지 않고 시상을 좀 더 확장해 갔으면 좋겠다.

  이선자의 시들은 섬시한 묘사력을 통해 하나의 장면이나 이야기를 비교적 선명하게 이끌어낸다. 그러나 지나치게 차분하고 평이해서 강력한 흡인력이나 시적 파장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강나현의 시들은 주로 “고요”에 바쳐지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시적 자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독특한 감각적 지향이 아직은 자기반복에 머무르고 있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수상한 분들께는 축하의 인사를, 다른 투고자들께는 계속 정진하시라는 격려를 전한다.

 

- 심사위원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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