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조 42

잔을 들게나/ 박기섭

🍀 아직 눈뜨지 않은 아침을 위해, 그 아침의 횡격막을 찢고 나올 꽃을 위해 어쩌겠느냐, 어차피 이길 수 없는 그리움이라면 그냥 져주는 거지 그리움한테, 져주지 않고 무슨 꽃을 피우겠느냐, 술 한 잔 꺾지 않고 어찌 저 마른 피딱지 같은 그리움의 꽃을 피우겠느냐 들게나! 폐허에 길들지 못한 네 청춘의 적막을 위해 잔을 들게나/ 박기섭 ㅡ《달콤한 오해》앤솔러지 현대사설시조포럼 2022 Vol.13 테마시조 '술'에 대한 사설시조 한 편 감상해 본다. 이렇게 멋진 시조를 감상하니 술이 절로 당긴다. 잔을 들어야 할 이유는 많다. 이래서 한 잔 저래서 한 잔, 슬퍼도 기뻐도 한 잔씩 갖다 붙이면 죄다 어울린다. 봄이라서 벚꽃이 피어서 외로워서 그리움에 져 줘야 하니까 한 잔 하는 거다. 그러니 친구여, 잔을 ..

좋은 시조 2023.04.13

이어폰 / 김선호

♧♤ 정녕 사랑한다면 감춰 두고 볼 일이다 새어드는 빛마저 장막으로 다 가리고 내장된 소리를 꺼내 혼자 들을 일이다 저밖에 모른다고, 사회성 모자란다고 따가운 눈총들이 귓가를 맴돌아도 귓속에 당도한 밀어 누설하지 말 일이다 이 말 저 말 뒤섞여 잡음이 판치는 세상 쓸 만한 말만 골라 또렷하게 들으면서 설중에 매화 피우듯 휘둘리지 말 일이다 '이어폰' 전문 / 김선호 2022년 김상옥백자예술상 우수상 수상작 ㅡㅡㅡ 오늘 와 닿은 시조는 김선호 시인의 '이어폰'이다. 진짜 사랑은 은밀하게, 잡음도 걷어내고 꼭 들을 소리만 골라 듣고 혼자서 하란다. 외부와 단절된 이어폰 속 세계는 더 내밀하고 그 사랑은 달콤할 것이다. 휘둘리지도 않고 절대 누설되지 않는 혼자만의 세계는 그만의 짜릿하거나 그윽한 유토피아가 될..

좋은 시조 2022.05.13

지금 꼭 아니어도 /양희영

지금 꼭 아니어도 / 양희영 물그림자 이는 그 물빛 너무 깊어 벌거벗은 두 발이 새봄을 신습니다 맨발이 읽으며 가는 갈피갈피 새재 길 더듬더듬 집 찾는 길섶 통거미와 틈틈이 든 볕살에 시린 발을 녹입니다 제치고 앞서가는 일 가만 내려놓으며 옛길 책바위에 돌멩이를 올리고 산길에 흠뻑 물든 나도 슬쩍 얹어놓고 맨발이 걸어갑니다 지금 꼭 아니어도 ㅡ 양희영 시조 시인의 시집 《물슬천의 아침》에서 내 고향 문경새재가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옮겨 보았다. 소풍도 가고 바람 쐬러 가고 하이킹도 가고 기뻐도 슬퍼도 새재에 갔다. 그때 우리는 새재밖에 갈 데가 없었다. 시조 단체에 가입하니 시조집이 자주 온다. 최근에 공감하며 편하게 읽은 시집이다. #양희영 #양희영시인 #물슬천의아침

좋은 시조 2022.02.12

주말 부부 클리닉 / 이송희

우리는 둘만의 비밀번호 공유했지 현관문 열자마자 마주 보는 빈 벽들 침묵이 도배된 방은 대체로 지루했어 흘러내린 이불 속에 적막은 더 부풀었지 아무도 모르게 지문조차 덮는 먼지 포트엔 여느 때처럼 한숨이 끓고 있어 혀끝에 침 발라 우표를 붙이던 아침 끝 문장을 쓰지 못한 편지가 그리운데 우리는 다 식은 주말에 저녁밥을 먹고 있어 정형시학 2021년 여름호 꼭지 자선작 #주말 부부 클리닉 #이송희 #정형시학

좋은 시조 2021.06.10

분리수거 / 이송희

어제를 분리해서 폐기하는 아침이면 소리가 흘러 넘칠까, 병뚜껑 덮은 채 우리는 얽힌 감정을 하나 둘 떼어 냈어 옷깃을 물고 있는 하마가 달아났어 당신을 머금던 눈물도 털어냈지 멍든 눈, 찢어진 입은 늪 속에 가뒀어 두터운 어둠을 접어 돌돌 말아 넣었지 서로의 속을 열어 나눠진 우리는 날마다 비워가면서 가벼워지고 있었어 정형시학 2021년 여름호 꼭지 자선작

좋은 시조 2021.06.10

붉은 신발 / 김진숙(제 3회 정음시조문학상 수상작)

[제3회 정음시조문학상 김진숙 시인] 제3회 정음시조문학상은 제주 출신 김진숙 시조시인의 '붉은 신발(기사 하단 전문 게재)'로 향했다. '정음시조문학상'은 등단 15년 미만 작가들의 5편의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해 수상작을 결정하는 시조문학상이다. 올해는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2천여 편의 시조 신작 중 본심에 오른 100편을 대상으로 심사가 진행됐다. 본심 심사는 민병도, 박명숙, 최영효 시인이 맡았다. 시조 '붉은 신발'은 제주 4.3사건 피해자 유족이 아버지의 묘소로 짐작되는 곳에서 피해자 유족 전체를 위로하듯 써낸 작품이다. 민병도 심사위원장은 심사평에서 "행불자 묘역의 아버지 영혼을 위해 흩어진 신발짝 맞추듯 흩어진 동백 꽃송이를 모아 짝을 맞추어 보는 화자로서의 시인"이라며 "4.3의 동백 이미..

좋은 시조 2021.05.20

이름의 고고학 / 이송희

널 만나고 오는 길에 네 이름을 지웠다 길들도 안개에 갇혀 제자리를 걷는 동안 여태껏 호명하지 못한 어둠들이 말 걸었다 내 것 아닌 이름을 땅 속에 파묻는다 메마른 손길들이 묵은 사랑 발굴할 때 지층을 들추며 찾아낼 너라는 고고학을 이름의 고고학 / 이송희 시집 《이름의 고고학 》책만드는집 2015년 이송희 시인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 수상, 아르코와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 시집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외, 평론집 『경계의 시학』 외,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 그 외 저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 #이름의 고고학 #이송희

좋은 시조 2021.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