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145

그러나, 봄 / 김성희

그러나, 봄 김성희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삶에 예외적인 순간에도 한계를 모르는 발톱은 자라난다 늘 꽃 피기를 바라는 나의 모퉁이에서 햇볕도 없이 붉어지는 매니큐어 하마터면 봄의 핏방울로 허공에 반사될 뻔 했다 그러니 피어라, 봄 사소한 한 개의 빛으로 수없이 많은 나를 쪼갠 관념들 나의 청춘은 캄캄한 뇌우에 지나지 않았으나* 한 무리 빛을 몰고 오는 오랑캐꽃처럼 심장에 당도할 보랏빛은 차라리 홀가분한 생의 빛깔이다 그러니 피어라, 봄 현관문을 열면 수북한 꽃잎의 눈동자 인공의 감정에도 율동하는 몸짓의 과잉은 나의 가냘픈 지금을 재촉하지 않을 것이다 * 보들레르의 시 시집《나는 자주 위험했다 》중에서 #김성희 #김성희시인 #그러나봄 #나는자주위험했다

좋은 시 2022.02.12

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 / 김밝은

나의 계절로 들락거리던 문 하나가 닫혔다 몰랐으면 좋았을 노래를 자작나무 더 커진 눈에서 찾아낸 후 몸보다 추워진 마음 때문인지 밖으로만 나가려는 다리를 붙잡느라 쓸데없는 고집만 늘어갔다 겨울 한 구석 찢겨져버린 시간의 응어리들이 새파랗게 멍든 이야기들을 몰고 우르르 들이닥칠 것만 같아서 따뜻한 눈길이라도 얹어줄 사람 하나 불러와 거짓말이 묻은 웃음에라도 얼굴 기대고 싶어졌다 깃털을 뽐내며 기웃거리던 멋쟁이새가 자작나무 어깨를 간질이며 벌써 지나간 것도 같은데 열어두겠다던 다른 쪽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미네르바 2020

좋은 시 2021.10.22

기웃거리다 / 김성희

손을 잡아도 그만 잡지 않아도 그만 어깨에 나부끼는 봄빛을 걸으며 오고 가는 인연으로 기웃거린 사람들 마음의 밝기를 낮추어도 봄볕에 풍성한 벚꽃 짧은 봄날을 함께 거닐다 바람의 방향으로 일제히 날아갔거나 허공의 아지랑이로 흩어졌어도 그저 좋은 뒷모습이 되자 우리가 살았던 들판이 우리가 기웃거렸던 타인이 부디, 아름다웠다고 기억하자 시집 《나는 자주 위험했다 》2020. 미네르바 김성희 시인 부산 출생 2015년 계간 《미네르바 》등단

좋은 시 2021.10.07

나는 자주 위험했다 /김성희

#골목 늦은 밤 골목은 세계의 끝으로 가는 미지다 곡선의 완곡어법으로 사라짐의 결말을 서술하는 문장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모퉁이에서 그만 눈빛을 잃은 후 얼굴이 무심한 사람과 동행했던 그때 나는 몹시 위험했다 #불면 짙은 어둠은 청춘의 외연을 감싸고 있었지 들키고 싶은 나를 포장하느라 달의 껍질을 벗겨냈던 불면 별들이 감꽃같이 반짝이던 봄밤이었고 캄캄한 슬픔에서 칸 칸 피어났던 허기진 문장들로 막무가내 시인을 열망했던 그때 나는 끝도 없이 위험했다 #비 우산 속에서 발끝만 보고 걷는 버릇이 있지 발끝에 날름거리는 물의 혀를 좇는 내 눈동자는 어두워 선과 악이 섞여 흐르는 물의 계단을 밟고 올라갔지 불편한 이름들이 물에 번식하는 축축한 공간 그때 서랍 속에 있어야 할 심장이 발밑에서 온통 젖어..

좋은 시 2021.10.07

느티나무 제단 / 김현주

느티나무침묵 속에 찌가 흔들립니다 가문 강바닥을 서성이던 한 울음이 걸렸나 봅니다 부르르 떠는 수면을 물고 제 몸을 한 자씩이나 튕겨 사랑을 고백하던 금기와 배반의 강가, 당신은 아픔을 모르는 물 밖의 아가미입니다 십사 년을 하루같이 세차게 물보라를 덜어내던 그런 물소리가 아직 내게도 있습니다 파문을 그리며 가만히 거슬러 오는 슬픈 어족의 일이란 강물에 눈물을 새기는 일 가문바닥을 헤매다가 영혼의 눈이 십리쯤 들어간 숭어 한 마리, 불꺼진 느티나무제단 위에 놓고 갑니다 몸부림치다가 제풀에 쓰러져 돌 같이 굳어진, 심장에 각을 떠서 어느 뜨거운 가슴 속으로 다시 헤엄쳐 갈 수 있도록 절뚝이면서 돌아서는 사람그림자 울음을 게워내던 강물이 조용히 이별처럼 흘러갑니다. 시집 『유채꽃 광장의 증언』 김현주 시인 ..

좋은 시 2021.10.04

비대면의 저쪽 / 김현주

선과 악이 서로 낯을 가리듯 서로의 얼굴을 가린 대문 앞, 택배아저씨가 기척도 없이 물건을 던지고 유령처럼 사라진다 너무나 조용하여 다읽지 못한 적막의 숨소리 휴지기에 들어간 성소는 지금 침묵을 번식 중이다 혓속에 갇힌 태초의 구음口音들 사랑이란 말들이 농밀하게 담겼을 입술을 가리고 사제들도 지저귀는 것이나 떠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책 넘기는 소리와 책상 무릎이 서로 부딪쳐 어둠의 난간을 붙들고 시간의 넓적다리가 녹는 중이다 경로를 벗어난 새들이 배회하는 봉쇄원 외로움의 극지에도 틈이 생긴 듯 사랑한다, 사랑한다, 한없이 길어지는 혀 영상 속 남자와 여자가 뜨겁게 포옹하고 있다 비대면 저쪽도 지금 고독을 탈피중인 듯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당신이겠지, 당신일 거야, 먼 데서 옮겨 심은 천리향이 ..

좋은 시 2021.10.04

각개전투 / 김현주

인큐베이터 안에서 숨쉬는 애호박, 작은 상자 안에서 자라는 송아지, 도살장으로 가는 황소의 쓸쓸한 눈, 칸막이 안에서 혼술하는 고시생, 빗방울 하나 없는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짓는 노아, 불탄 노트르담 성당에서 안전모를 쓴 채 연주하는 오르가니스트, 텅 빈 성전에서 허공을 치며 설교하는 성직자, 비닐 옷을 입고 돼지트럭을 운전하는 아저씨, 호시탐탐 노리는 적병을 곁눈질하며 각자 벌이는 생의 전투가 치열하다 불안을 장전한 단 하나의 무기는 흠 없는 마스크, 문상객도 없이 홀로 거두는 최후의 숨을, 자루에 쓸어 담는 검은 그림자 언젠가 불태워질 낙엽, 저 외로운 전투를 누군가 도와줘야 하는데. 시집 『유채꽃 광장의 증언』 김현주 시인 전주 출생 칼빈신학대, 고려신학대 졸 2007년 『시선』등단 시집 『페르시안..

좋은 시 2021.10.04

끈 / 강문숙

끈 / 강문숙 마음을 다해 얽어맨다 나뭇가지가 쓰러지거나 왜곡되지 않게 잡아당겨 고정시킨다. 팽팽하게 바로 자라라 튼튼하게 서 있어라 비가 오고 바람 불어도 너는 쓰러지면 안 된다 중심 없이 흔들리는 건 치욕이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는 건 滅이므로 살아남으려면 이 끈을 꽉 잡고 있어야 한다 나뭇가지는 끈의 영혼을 빨아먹고 언젠가 제 하늘을 꿈꾼다 낡아가는 저 끈은 삭은 비애다 보풀이 일고 제 허리의 관절이 무너질 때까지 잉여의 시간으로 슬프다 끈이란 끊어지는 게 가장 아름다운 최후다 나뭇가지를 놓아줄 때가 온 것이다 강문숙 /1991년 《매일신문》신춘문예,《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탁자 위의 사막 》, 《따뜻한 종이컵》,《신비한 저녁이 오다》외. 대구시인협회상, 대구문학상 수상

좋은 시 2021.09.14

악플 / 하린

악플 하린 입을 열두 개나 가진 악담은 오늘 아침에도 따분했다 자음과 모음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서로의 생각을 파먹으며 과장되게 몸짓만을 부풀렸다 은밀한 건 좋지만 내밀한 건 싫다고 토로했다 매번 불구의 날들을 확인하고도 명랑하다니 누군가 자신을 추궁하는 건 용서했지만 모른 척하는 건 못 견뎌했다 악담이 번식시킨 레퀴엠의 시간 가시를 잔뜩 품은 다짐이 목구멍을 관통할 때, 타인과 타인 사이 도피와 회피의 차이가 분명해졌다 어둠의 결심보다 빛의 변심이 흔해졌고 말들은 스스로 질식하는 꿈을 꾸곤 했다 어느 순간 음지에서 피는 꽃이 진실을 토했다 그런데도 악담은 고압선 위 까마귀처럼 무탈했다 독주를 마신 이야기 속 주인공이 별들과 서러움을 교환하며 비굴을 감행했다 악담은 껄껄껄 웃었다 이제 막 떨어지고 있는 눈..

좋은 시 2021.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