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미 수필 & 산문

머피의 법칙?

서해기린 2011. 9. 6. 19:05

 

 

 

 

가끔 이런 일이 있다. 잔뜩 벼르고 가면 그날따라 '정기휴일'이란 문구…… 

목욕탕, 미용실, 음식점 등이 가장 흔하게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면, 뭐야? 가는 날이 장날이잖아,  하며 재수없다는 듯 돌아온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1시에 점심 약속이 있었고 다른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기어 나오는 귀주변의 흰머리를 염색할겸 오전에 단골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실 다녀온 바로 다음 번엔 집에서 혼자 뿌리 부분만 간단히 염색하지만 좀 지나면 한 번씩 미장원에서 전체적으로 염색을 한다. 나이들어 보이는 것이 싫어서 줄기차게 염색을 해대는 내가 서글퍼진다.

 

이제는 목덜미까지 그놈의 흰머리가 내려와 성가시게 한다. 아직 검은 머리를 유지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친정 엄마를 닮아서 불혹 주변부터 염색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불행중 다행이라면 좌우 얼굴 가장자리에 국한된 정도라 정수리 부분부터 하얗게 변하는 사람들에 비해 가끔 윗머리를 내려 감출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미용실에서 기다리는 틈을 타 읽으려고 책도 한 권 숄더백에 넣었다. 미용실은 집으로부터 걸어서 10분정도 거리에 있다. 나는 골목길을 산책하며 남의 집에서 자라는 나무나 화초를 훔쳐보는 것이 취미다.  공터에서 자라는 것이나 담넘어 내려온 것들, 아파트나 빌라의 화단에서 자라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 마음에 들면 사진을 찍는다. 작정하고 카메라를 가져가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냥 핸드폰으로 찍기로 했다.

 

맨 먼저 내 눈길을 끈 것이 석류였다. 담장을 넘어와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 위로 아직 터지지 않은 주홍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저 녀석은 꽃으로 피었을 때도 얼마나 예뻤던가. 하늘을 배경으로 석류를 찍고 잠자리와 채송화, 과꽃도 찍으며  미용실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있었다.

'맞아 오늘이 화요일이었지.'

낭패였다. 약속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근처 음식점까지가 도보로 10분 남짓이라 염색을 마치고 걸어가려 했었다. 

'어떻게 하지?'

 

여느 때 같으면 미리 이모저모 따지지 않은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정말 재수없네, 하며 속상해 했을 터지만 왠일인지 오늘은 내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내일 토론시간에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 잘 됐다. 동네 도서관도 걸으면 금방이지만 더운데 파라솔을 쓰고 왔다갔다 하느니  바로 앞 복개천 주차장에 군데군데 정자와 등나무 쉼터가 있으니 거기서 읽기로 했다.

 

교차로가 보이는 등나무 쉼터에는 마침 테이블도 놓여 있었다. 반가웠다. 꼭 나를 위해 마련된 자리 같았다. 양지쪽은 가을 햇살에 더웠지만 그늘은 시원했고 가까운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도 상쾌했다. 물티슈를 꺼내 테이블과 벤치의 먼지를 닦아내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고 책도 잡거나 누르지 않으면 바람이 그냥 두지 않았다.  이 드물고 유쾌한 모습을 나중에 추억할 겸 파라솔과 책이 놓여 있는 테이블을 사진으로 담았다. 신호대기중이거나 지나가는 자동차와 내려온 등나무 가지를 배경으로  찍었다.

 

재미있었다. 읽고 있던 책의 내용도, 이런 상황도 다 재미있고 좋았다.  읽어야 할 분량을 다 읽고 시계를 보니 15분이 남아 있었다. 숙제를 다 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집에서는 컴퓨터와 TV란 훼방꾼이 있어 집중이 잘 되지 않았는데 홀가분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만나기로 한 그의 회사 동료 부인이다. 집을 나섰느냐, 걸어가느냐, 태우러 가겠다, 하는 것을 나는

아뇨, 나 걷는 거 좋아해요,  라고 웃으며 말했다.

 

만일 내가 오늘 닫힌 미용실 문을 보고 여느 때처럼

아유! 정말 안풀리네, 하며 짜증을 냈더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마음을 고쳐 먹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기분 좋은 독서시간이 주어졌던 것이다. 화창한 초가을, 만나기로 한 음식점으로 걸어가며  내 마음은 상쾌하고  즐거웠다.

'머피의 법칙? 그런 건 이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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