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그림자
나무만 그림자가 있는 게 아니다
고양이를 사랑하면서 그림자가 생긴다
그들이 크면서 그림자도 커진다
그림자가 더 빨리 큰다
너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잘 모르겠지
잘 안 보이지
만약에
네가 혹은 내가 잠 잘 때 밥 먹을 때
너의 혹은 나의 그림자가 서로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졸시/ 그림자-
고양이 남매를 키우면서, 그들과 더 친해질수록 내 고민이 많아지고 깊어진다.
우선 중성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짐승이지만 그런 수술을 시킨다는 것이 못할 짓 같아 내 마음의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벌써 태어난 지가 여덟 달은 되어 가는데 철딱서니 없는 남매인 불이와 또다람이가 사고를 칠까봐 자나깨나 걱정이다. 아무리
고양이기로서니 근친상간(近親相姦)은 안 된다.
그래서 둘 중에 오빠인 불이부터 먼저 해결하려고 벼르고 벼리어서 병원에 예약까지 해놓았지만 이동장에 넣는데 실패를 했다.
세 번이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버렸다. 게다가 빠져나가면서 이 녀석이 내 얼굴을 쓰윽 긁는 바람에 윗입술 부위와 콧등에
피까지 봐야했다.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피는 제법 흘러서 나는 화도 났고 많은 생각을 하면서 잔뜩 심각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고생을 사서 하는고.
나중에 더 큰 사고를 입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 날씨만 풀리면 이 녀석들을 바깥으로 다시 보내버리고 말자.
하루 동안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결국은 화도 사그러지고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바깥이 저들에게 안전하고 풍요롭다면 까짓 내 서운함이야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내가 저들의 팔자에 개입이 되어,
저들은 이제 바깥으로 나간다 해도 적응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끝까지 보호해주어야 할 양심과 책임이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그런 일이 있고난 후 불이의 모습이었다. '나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그랬어요?’하는 표정이 얼마나 안쓰러운지
그 표정을 풀어주려고 며칠 간 애를 썼다. 녀석들을 위해서 다시 날을 잡아 병원엔 데려가야겠지만, 밖으로 내보낸다는
생각은 다시는 않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걱정을 만들었다. 내가 스스로 이들을 거두어서 만든 그림자이다. 길을 가다가 잠시 스쳐가는
고양이들은 내게 이런 고민을 안겨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들은 내게로 와서 날마다 크게 웃을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준 대신에 이런 그림자를 안겨주었다. 이들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 비비적거리고 재롱을 떨수록 내 걱정도 더 커진다.
이 녀석들이 배고픈가, 목마른가, 추운가 더운가, 졸리는가 심심한가. 내가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배고프든 목마르든
그게 뭐 그리 대수일까. 사랑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인 모양이다. 그림자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애매모호할 때가 있다. 내가 상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상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옛시조에서도 그렇게 말하지만, 사랑이란 추상명사는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니 둥근지 모났는지,
긴지 짧은지 모를 일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고, '아니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도 한다. 그 모호함 때문에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를 일이다.
문득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가장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 자식 사이든, 부부 사이든, 연인 사이든, 친구 사이든 내가 가장 걱정하는 사람, 내게 가장 큰 그늘을 드리우는 사람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잠을 자면서도 생각나는 사람,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나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그의 그림자는 내 잠도 밥도 방해한다. 그러고 보니 밥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문득 호박죽을 먹으면서, 차를 마시면서 내 생각을 했다는 분이 생각난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조향순-
[출처] 106. 사랑의 그림자 (시산문(詩散門)) |작성자 날개
4월1일 금오산 자락에서 조향순 시인의 시산문을 올려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길고양이 두 마리를 새끼 때 거두어 키우시고 계십니다. 팔자에 개입하면 끝까지 가야하는 것이며
사랑하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며
밥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키우던 강아지 하늘이 생각도 나고
그림자를 만들어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것 먹을 때 떠오르는 아들과 어머니도 생각나네요.
'좋은 수필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걷기는 몸 운동, 마음 운동이다/김기택 (0) | 2012.07.27 |
---|---|
도종환 산문,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중에서 (0) | 2012.07.16 |
함민복 에세이/산소코뚜레 (0) | 2011.12.28 |
박경리 선생의 마지막 산문/물질의 위험한 힘 (0) | 2011.12.19 |
혼자 걸어도/조향순 (0) | 2011.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