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 산문

걷기는 몸 운동, 마음 운동이다/김기택

서해기린 2012. 7. 27. 15:09

 

 

 

 

  

 

 

   내 주변에 사는 작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걷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북한산에 자주 오르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주로 걷는다. 일부러 버스정거장 서너 개를 남겨 두고 내려서 집으로 가는가 하면 약속 장소까지 한 시간 넘게 걷기도 한다. 걷기는 건강을 위한 좋은 습관일 뿐 아니라 창작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나도 자극을 받아 자주 걷는다. 걷다 보니 매일 다니는 큰길이 지루해 처음 가보는 골목길을 찾게 된다. 우리 동네 실핏줄 같은 골목길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해 구불구불 돌다 보면 사람 사는 냄새와 그늘에 가려진 자잘한 삶의 모습이 흥미를 돋운다. 평소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새로운 면을 보고 놀라는 것 같은 즐거움을 골목길이 주기도 한다. 집 근처에 옛날 이발소가 두 개나 있다는 걸 알려준 것도 골목길이었다. 자동차와 대로와 바쁜 일상이 이 즐거움을 앗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원과 시인으로 사느라 정신없을 때 나에게 계속 시를 쓰게 해준 것도 걷기였다. 시 쓰기가 즐거워도 직장 생활과 병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에는 시 쓰는 일이 한가한 일이었는데 등단하고 나니 확 달랐다. 취미로 끼적거리는 것 갖고는 어림없었다. 시는, 분량은 적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꽤 필요하다. 힘들인 만큼 완성도가 달라진다. 적당히 시처럼 보이게 쓰기는 쉬워도 잘 쓰기는 어렵다. 회사 일을 줄이거나 조금 하고 많이 한 것처럼 눈가림할 수는 없었다. 우선순위로 따지자면 먹고사는 일이 먼저고 시 쓰기는 그 다음이다. 자연히 시 쓸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다. 스스로 좋아서 시작한 일이 짐이 되고 일이 되고 책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출퇴근 시간이나 외출 시간에 걷다가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종종 생겼다. 시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얼른 받아써야 했다. 부랴부랴 주머니를 뒤져 영수증 쪽지라도 찾아내 메모를 했다. 바로 포획하지 않으면 그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옷을 갈아입다가 주머니 여기저기서 쪽지들이 튀어 나오기도 했다. 시는 전혀 시 같지 않은 사소한 곳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지나가곤 한다. 그러나 좋은 시는 위장해도 찰나에 월척의 느낌이 온다.

 
 회사에서는 시간이 생긴다 해도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밤늦게 혼자 사무실에 있더라도 보이지 않는 눈이 늘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고, 조금이라도 뒷골이 당기면 시적 상상력은 바로 움츠러들었다. 책상 앞에서 펜과 백지를 준비하고 분위기 잡고 쓰려고 할 때도 시가 써지지 않았다. 쓰려고 의식하면 시는 오지 않는다. 시는 상식이 아니라 몸속 깊이 숨겨진 내면을 꺼내는 일이고,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길에서는 많은 사람이 옆에 있어도, 주변이 시끄러워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시를 쓸 때 필요한 것은 조용한 분위기와 독립된 장소가 아니라 의식의 자유로움과 익명성의 편리함이었다. 시끄럽고 혼잡한 전철이나 버스나 대로변에서도 홀로 산사에 있는 듯 집중하여 시를 쓸 수 있었다. 소음과 혼잡과 어수선함은 시를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시 쓰는 나를 자극했다. 길은 활기차다. 그 활기가 내 감각과 정서를 자극하고 내 시적 상상력을 활성화시킨다. 실내는 막힌 공간이지만 길은 무한히 열린 공간이다.

 시적 영감은 대체로 휴식의 순간에 온다. 길에 나서면 애써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과 의무로부터 해방된다. 생각 없이 눈에 닿는 대로 시선을 던지게 된다. 방심 상태가 된다. 휴식과 방심은 내면을 억압하지 않기 때문에 직관적, 창조적인 사유가 잘 흘러나오도록 유도한다. 걸으면서 사색하기를 즐겨 했던 장 자크 루소도 “걷기에는 내 생각들에 활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한자리에 머물고 있으면 거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내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그 속에 내 정신이 담긴다”고 하였다.

 머리는 종종 나를 속여도 발과 심장은 정직하다. 걷자. 발과 심장으로 내 안의 잠재력을 마사지하자. 내 몸의 창조적 리듬을 뛰게 하자.

  

       -김기택 시인-

 

 

 

 

 

  

 

    어디 작가들만 걸을까? 아줌마도 걷고 아저씨도 걷는다. 연예인도 걷고 사장님도 걷는다. 걷기 열풍이 일고 있다. 나는 골목길 걷기를 즐긴다. 그 골목에서 <곰탱이>도 만난다. <곰탱이>는 반달곰처럼 가슴 윗쪽에 흰색 반달무늬가 있는 검은 개다. 내가 산책길에 만나는 어느 집 견공이다. 몸집이 커다랗고 순해터져서 짖지도 않는다. 지나다 곰탱아! 부르면 꼬리를 치며 얼른 달려와 낮은 담장위로 제 머리와 앞발을 올려놓고 쓰다듬어 달라고 한다.  

   "잘 있었어?" 

   손이라도 내밀면 내 손바닥에 제 턱을 척 올려 놓는다. 뺨을 부비기도 하고 외롭고 심심했다는 듯 깊은 눈으로 바라본다. 

 

   걸으며 늘 이집저집 기웃거린다. 마당에 뭐가 자라나, 어떤 꽂이 피었나 궁금해서다. 요즘은 능소화가 담넘어 내려오는 집이 예쁘다. 담장안에 갇힌 어느 궁녀의 애절한 마음이 능소화로 피었단다. 석류와 무화과가 자라는 집도 있다. 호두가 달리거나 감이 담장에 내려앉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채송화나 봉숭아가 있는 집이 제일 반갑고 좋다. 옛날 우리집에서 보던 꽃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손톱에 꽃물 들이던 즐거운 때를 추억한다.

 

   가끔은 그나 아이들과 말다툼을 하고 답답해져서 걷는다. 골목을 지나고 큰 길도 하나 건너 산자락에 있는 중학교까지 간다.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나와 교정 뒤 화단에서 이꽃저꽃 찍다가 보면 어느 새 마음이 가벼워진다.  족두리꽃이나 접시꽃, 바늘꽃, 부용화, 해바라기, 백일홍, 분꽃 같은 것도 있고 금귤 나무에 새도 앉았다 날아간다. 열매를 반만 파먹은 채로 남겨두고 간다. 나비도 나폴나폴, 꿀벌도 윙윙거리며 꽃을 찾는다. 

 

   중학교 맞은 편에 산비탈을 깎아 세운 아파트로 들어선다.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맨 끝에 지인의 집이 있다. 그집 앞 화단에 핀  비비츄와 산나리가 좋아서 간다. 봄에 피었던 윤판나물은 동글동글한 열매를 달고 있다. 목백일홍도 붉게 피었다. 하늘이 나오게 찍어야 예쁘니 무릎을 구부려 낮은 자세를 취한다. 꽃사이로 보면 다 같은 하늘도 나만의 하늘이다. 내려오며 공터를 만난다. 옥수수가 수염을 달고 익어간다. 도라지꽃이 흰색과 자주색으로 피어 옥수수와 잘 어울린다. 도라지꽃은 소박하면서도 예쁘다. 어릴때는 등하굣길에 봉오리를 터뜨리며 뽁 하고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재미있어서 자꾸 터뜨렸다. 개망초도 금오산으로 가는 언덕에 피었다.  내 속에 쌓였던 응어리들이 눈녹듯 사라지고 이미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다. 언제 내 안에 노여움과 서러움 따위가 있었던가?  

 

   운동을 작정하고 걸을 때는 빈손으로 걷는다. 그럴때도 잠시 숨을 고르느라 걸음을 늦출 때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들어와 안긴다. 사람도 작은 풀꽃도 길잃은 동물들도 잠자리와 나비까지 다 보인다. 모두가 내 족속인 것 같고 정이 간다.  걸으면 사색의 공간이 펼쳐진다. 강이나 호숫가,  들녘을 산책할 때처럼 사유의 바다가 넓고 깊을 때도 없다. 시인에게 시상이 떠오르고 작곡가에겐 악상이 떠오르기도 하겠다. 걸으면 몸도 마음도 다 건강해 진다. 걷자. 자주 걷자. 틈이 나는대로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