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 산문

봄/피천득

서해기린 2013. 5. 7. 23:50

 

 

 

 

 

 

 

“인생(人生)은 빈 술잔, 주단(綢緞) 깔지 않은 층계,

사월은 천치(天癡)와 같이 중얼거리고 꽃 뿌리며 온다.”

이러한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사월(四月)은 가장 잔인(殘忍)한 달.”

이렇게 읊은 시인(詩人)도 있다.

 

이들은 사치(奢侈)스런 사람들이다.

나같이 범속(凡俗)한 사람은 봄을 기다린다.

봄이 오면 무겁고 두꺼운 옷을 벗어 버리는 것만 해도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주름살 잡힌 얼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미소(微笑)를 띠우고

하늘을 바라다보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나는 음악(音樂)을 들을 때, 그림이나 조각(彫刻)을 들여다볼 때,

잃어버린 젊음을 안개 속에 잠깐 만나는 일이 있다.

 

문학(文學)을 업(業)으로 하는 나의 기쁨의 하나는,

글을 통하여 먼 발자취라도 젊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젊음을 다시 가져 보게 하는 것은 봄이다.

 

잃었던 젊음을 잠깐이라도 만나 본다는 것은

헤어졌던 애인(愛人)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다.

헤어진 애인(愛人)이 여자(女子)라면 뚱뚱해졌거나,

말라 바스러졌거나 둘 중이요,

남자(男子)라면 낡은 털자켓 같이 축 늘어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얼굴이 시뻘개지고, 눈빛이 혼탁(混濁)해졌을 것이다.

 

젊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답다.

지나간 날의 애인(愛人)에게서는 환멸(幻滅)을 느껴도,

누구나 잃어버린 젊음에게서는 안타까운 미련을 갖는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의 초조(焦燥)와 번뇌(煩惱)를

해탈(解脫)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安靜)’이라는 것은 무기력(無氣力)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事物)에 대한 무관심(無關心)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知性)과 둔(鈍)해진 감수성(感受性)에 대한

슬픈 위안(慰安)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智慧)도 젊음만은 못하다.

 

인생(人生)은 40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40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는 소설(小說)의 주인공(主人公)들은

93퍼센트가 사십(四十) 미만(未滿)의 인물(人物)들이다.

그러니 사십(四十)부터는 여생(餘生)인가 한다.

40년이라면 인생(人生)은 짧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면 그리 짧은 편도 아니다.

 

‘나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

하고, 부르는 아이들의 나비는 작년(昨年)에 왔던 나비는 아니다.

강남(江南)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지만 그 제비는

몇 놈이나 다시 올 수 있을까?

<키츠>가 들은 나이팅게일은 4천 년 전 <루스>가 이역(異域)

강냉이 밭 속에서 눈물 흘리며 듣던 새는 아니다.

그가 젊었기 때문에 불사조(不死鳥)라는 화려(華麗)한 말을

써 본 것이다. 나비나 나이팅게일의 생명(生命)보다는

인생(人生)은 몇 갑절이 길다.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 ․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 ․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40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祝福)은 아니다.

더구나 봄이 40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多幸)한 것이다.

 

녹슬은 심장(心臟)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건을 못 사는 사람에게도 찬란(燦爛)한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

나는 비록 청춘(靑春)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왕궁(王宮)에

유폐(幽閉)되어 있는 금(金)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아아, 봄이 오고 있다.

순간마다 가까워 오는 봄!

 

-피천득-

 

 

 

 

 

 

  수필, 하면 흔히 피천득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교과서에 나온 그의 수필 <인연>은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지요.  <봄>이란 제목의 이 수필도 인상적인데요, 저는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는 이 말에 특히 공감합니다.

봄을 쉰 번이나 넘게 누릴 수 있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봄이 무르익어 초여름이 곧 닥쳐올 것만 같으니 이 봄이 가기

전에  젊음을 맘껏 누려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아파트 옆으로 수로를 따라 금오산 입구까지 호젓한 들길이 나 있어서 매일 제비꽃, 냉이꽃 같은 들꽃들을 보며

걷습니다. 청보리, 마늘, 상추, 감자 같은 작물이 자라는 것도 볼 수 있지요. 요즘은 고추나 가지, 고구마  모종을 심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조금의 공터도 그냥 버려두지 않는 사람들은 수로 옆 길에도 사람 하나 겨우 다닐 만한 공간만 놔둔 채  말뚝부터

박아놓고 울타리를 쳐서 도라지며 완두콩이며 부추, 파 같은 것을 잔뜩 심어 놓았습니다. 논둑, 밭둑에도 옥수수나 호박, 매화나

무가 자라고 있네요.

 

 

 

 

  오늘은 여름 날씨처럼 갑자기 더워졌는데 그래서인지 연두는 초록으로 짙어지고 쑥이며 쑥갓도 쑥쑥 자라 있더군요. 대파는

허공에 둥근 파꽃들을 잔뜩 매달고 있었어요. 하얀 불꽃들이 팡팡 터지는 것 같은.

  유채밭에는 노랑꽃이 만발했고요, 봄은 젊어서 아름답다고 나도 젊어지는 것 같다고 기분 좋은 착각을 하며 걸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