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광복절에 체험한 것을 <내 사는 얘기> 카테고리에 [우리 엄마 흙놀이터 3-고추따기 ]란
제목으로 기록해 두었었다.
그것을 수필로 다듬어 작년 「구미수필」에 실었는데 지금이 고추가 익어가는 시절이라 옮겨와 본다.
마침 내 텃밭에도 매일 고추가 붉어 간다.
고추를 따며 / 정상미
여동생과 같이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얼핏 봐서는 아주 좋아 보이던 고추밭이 막상 들어가 보니 탄저병이 번져 거의 전멸 상태다. 그것도 모르고 엄마는 가서 병든 게 있으면 담으라고 별도로 비닐봉지를 주셨다. 성한 것에 병이 옮을지 모르니 따로 따서 담았다가 땅에 묻으라 했다. 병든 고추가 너무 많아서 우리는 그냥 버려두기로 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 왠지 목이 메어 왔다. 그간 흘린 엄마의 땀방울이 소중해서라도 기왕이면 잘 되기를 바랐는데 한숨이 절로 났다.
땡볕이 내리쬐는 고추밭은 물을 뿌린 용광로 같았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입에서는 단내가 푹푹 났다. 농사일이라곤 정말 젬병인 내가 효도랍시고 이날 참 무리를 했다. 고개도 아프고 팔도 쑤시고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목까지 갈증으로 타 들어 갔다.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던지 보온병에 가지고 간 매실음료가 금세 동이 났다. 쉬어 가며 해도 왼쪽 머리가 쿡쿡 쑤셔 오는 게 더위를 먹은 것 같았다. 동생은 몸집은 작아도 야무졌다. 따는 속도가 두 배는 빨랐다. 엉덩이에 쿠션을 달고 앉아서 따니 모양은 우스꽝스러워도 그나마 나았다. 골프장 캐디처럼 챙 넓은 모자에다 몸빼와 장화까지 갖춘 터라 여간 답답하지 않았다.
고춧대는 생각보다 아주 연했다. 잘못 건드리면 가지가 채로 꺾어지기 일쑤였다. 어떤 것은 멀쩡한 고추의 허리나 목이 탁 부러지기도 했다. 탄저병이 심한 부분은 고추를 한 개도 건지지 못하고 아예 아래 부분을 부러뜨려 그루 째 버려야만 했다. 군데군데 고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 무렵이 떠올랐다. 핏기 하나 없이 누렇게 뜬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실내를 꽉 메운 퀴퀴하고 역한 냄새가 겹으로 나를 에워싸는 것 같다. 고추밭이여. 이 참담한 모양을 어쩌란 말이냐. 엄마가 오시지 못한 것이 다행이다.
갑자기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잠시 감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비에 젖는 흙냄새는 낯익다. 고향냄새다. 눈을 감고 마음껏 마시니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루에 걸터앉은 내가 보인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마당이 패이는 게 보인다. 지렁이도 기어 다닌다. 황구는 얼른 제 집으로 숨어들었다. 동생들과 언니 오빠가 보이고 엄마가 강낭콩이 박힌 개떡을 쪄서 채반에 받치고 나오신다.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옛 추억에 빠져 드는 사이, 소나기였는지 이내 비는 그치고 구름도 슬슬 물러난다. 멀리 주흘산은 구름에 가려 옆모습만 조금 보였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저 맞은편 봉우리 아래 첫 동네는 그 옛날 내가 태어난 곳이다. 저 깡촌에서 나와 읍내로 대구로 서울로 미국으로 점점 생활반경을 넓혀 나갔었다. 이제는 다시 구미에서 십 수년을 살고 있지만 저 하늘 아래 첫 동네를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내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았음으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들꽃 하나에도 더 정이 가고 사랑스럽다. 내게 풍부한 정서적 소양을 심어 준 저 산과 하늘, 들녘은 아직도 오롯이 내 마음속에 있다.
이렇게 힘든 농사를 엄마는 왜 하셨을까? 최근에 엄마는 왼쪽무릎에 관절염이 심하게 와서 걷기도 힘든 상태가 아닌가. 수술이 불가피 할 수도 있다. 연세가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괜히 농사짓다가 무릎에 병이 나신 것 같아 안타깝다. 농사 같은 거 짓지 말고 놀러나 다니시라고 그토록 말렸는데도 듣지 않으시더니 결국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 매일 물리치료에 가끔씩 뼈 주사에, 차 오른 물도 빼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가 그새 더 늙어 보였다. 이마의 주름살도 더 굵게 패이고 피부는 새까맣고 거칠거칠했다.
열흘 전쯤 친정에 갔다가 엄마가 절룩거리며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보았다. 구십 도로 접힌 허리에 유모차를 앞세우고 계셨다. 구부린 자세가 몸에 부담을 주는지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서 쉬고 또 쉬고 하셨다. 진과 물이 다 빠진 쭉정이 같은 엄마, 여덟이나 되는 자식들을 채우시느라 점점 비어간다.
탱탱했던 가슴은 늘어지고 푸짐했던 둔부와 허벅지는 훌쭉해졌다. 엄마는 내게도 소리 없이 스며들어 나는 어느새 볼록한 여자가 되고 아이 엄마가 되었다. 자식은 성하고 부모는 쇠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던가. 작고 약해 진 엄마의 모습에 울컥 목이 멘다. 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가끔 우시기는 해도 그나마 씩씩한 엄마가 고마웠다.
잰 걸음으로 따라가 옆에 섰다. 엄마의 느린 걸음에 맞추느라 나도 몇 번씩이나 쉬며 갔다.
"엄마, 가까운 데는 편하게 그냥 지팡이 짚고 다니지 그래여?"
"아유! 챙피해서 싫어. 난 지팽이보다 이기 핀해여."
숨이 찬 듯 엄마는 짧은 한마디도 힘들어 하셨다. 고혈압과 골다공증에 무릎까지 성하신 데가 별로 없다. 가정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았던 아버지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 하셨으니 눈물로 지샌 날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한량인 아버지는 늘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셨다. 때문에 엄마는 몇 번이나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 하시며 이모집을 오가셨다. 월급을 가져오지 않거나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아서 등록금철만 되면 엄마는 여기저기 돈을 구하러 다니셔야 했다.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대든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의외로 말씀이 없으셨다. 내 눈을 쳐다보시지도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했다.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잘 하신 것은 퇴직금을 연금으로 돌리고 가신 것이다. 눈을 감으시며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단다. 내게 그 말씀을 하시는 엄마의 눈빛에는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다. 늙는다는 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라지만 엄마의 모습을 그저 무겁게 바라보아야만 하니 가슴이 아프다. 자주 찾아뵙고 맛있는 것 해 드리고, 용돈을 드리고 애를 쓰지만 내 마음이 흡족하지는 않다.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는 전화를 여러 번 해도 받지 않으니 무슨 일이 났는지 걱정을 하셨단다. 두시 반인데 점심도 안 먹고 뭐하냐며 빨리 오라고 하신다. 사실 중간 중간 간식을 먹어서인지 그리 시장하지 않았다. 따 놓은 고추가 여섯 푸대나 된다. 차가 다니지 못하는 곳이라 푸대를 외발 리어카로 집까지 옮겼다. 엄마는 입이 귀에 걸렸다. 역시 내 딸들이야, 하시는 것 같았다.
그 몸으로 기어이 엄마는 밥상을 차려 내셨다. 꿀맛 같았다. 무를 푹 익힌 얼큰한 고등어조림이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두부조림도 간이 잘 맞고 은근한 맛이 있었다. 오이냉채는 시원했고 비름나물은 직접 농사를 지으신 참기름으로 무쳐서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어릴 때부터 먹던 맛 그대로였다. 들기름에 바삭하게 구운 김과 노릇노릇하게 구어 진 조기구이는 또 어떤가. 엄마의 맛, 앞으로 얼마나 더 엄마의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하룻밤 푹 자고 다음 날 오고 싶었지만 동생과 나는 길을 나섰다.
고추를 따며 앉았다 섰다를 반복했더니 허벅지에 근육이 뭉쳐서 벌을 선 것처럼 아프다. 힘이 하나도 없고 머리가 묵직하다. 새삼 엄마가 대단해 보인다. 나는 반나절을 하고도 이렇게 녹초가 되었는데 엄마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내년에는 기력이 달려서 농사를 못 지으신다 하지만 또 씨를 뿌리시지 않을까. 엄마의 마음과 땀이 녹아 든 잘 생기고 싱싱한 고추들을 오래 들여다본다. 지독한 탄저병에도 살아남은 저 당당한 고추는 온갖 역경을 이겨 내고 8남매를 잘 키워 내신 우리엄마의 얼굴이다. 더위 이상으로 엄마의 사랑도 푸지게 먹은 날이다.
-끝-
2012. <구미수필>
그해 추석을 쇠고 바로 엄마는 인공관절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잘 걸어 다니신다.
물론 접힌 허리는 어쩔 수 없어서 여전히 유모차를 앞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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