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동구 밖 산책하다가
길 잘못 들어 어느 골짜기에서 너를 만났네
물동이 같고 독항아리 같은 너
행여나 수줍은 아낙이 옷고름 물고 나타날 것만 같아
해거름이면 바람이 나서 너에게로 종종걸음 놓았네
개망초꽃으로 흔들리며 살포시 다가가거나
강아지풀로 꼬리 치며 언저리를 맴돌았네
네 볼우물처럼 파인 모래톱에 발자국 새기거나
네 무릎인 양 못가 바윗돌에 걸터앉기도 했네
까치노을 물들인 네 불그레한 낯바닥을
나는 물잠자리와 소금쟁이마냥 떠다녔네
어제는 산돌림으로, 오늘은 여우비로, 내일은 모다깃비로
잔잔한 네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네
투둑투둑, 한여름이 타개지면서
난 어느새 너에게 빠져들고 말았네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잠기고 꿈속까지 물이 차오를까 봐
너는 높다란 다락방에 깃들고 싶다 했네
내 생의 아름다운 골짜기, 숨은 사랑 거기 있었네
『대구문학 』 2021년 2월호
장하빈
1997년 《 시와 시학》으로 등단 / 시와시학상 동인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시집 『비, 혹은 얼룩말 』, 『까치 낙관』, 『총총난필 복사꽃 』, 『신의 잠꼬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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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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