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김호진
가로수는 부끄럽지도 않은가 보다
대낮에 바람과 몸 섞으며 깔깔거렸다
엿보던 마음이 한눈 파는 사이
잠깐 얼굴 붉히는가 했는데
이내 예고도 없이 한꺼번에 홀딱
옷을 벗어버리고 만다
저 당돌함이 못내 부럽다
나는 옷을 한 겹 더 꺼내 입는다
당돌해진 저 은행나무를 향하여
숨겨야 할 세상 하나 더 껴입는다
사진출처: <너나들이>님
11월/엄원태
불현듯 사방이 어두워졌다.
마음에 스위치 꺼지듯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주 깜박이는 추억에도 점멸장치가 있어
한동안 꺼놓았다가 필요할 때 켤 수 있으면 좋겠다.
만상이 그렇게 한순간에 늙어간다.
슬픔도 속살 메마르고 까칠해서, 부지불식간이다.
축생, 혹은 먼지 같은 날들,
생이 마냥 누추해지는 한 시절 있다.
추억이란, 어둠 속으로 제 추운 그림자를 밀어넣는 일.
검은 외투를 걸친 어느 후생의 저녁은
설핏 뒷모습만 보여주고 가뭇없다.
허공에 총총하던, 무당거미들이 사라진 11월,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아라파호' 인디언들이 11월을 지칭하는 말.
11월/김연성
잎들은 스스로 나무를 버렸다
빈 가지 끝에
가시처럼 11월이 걸려 있다
두 번째의 통증은 거대한 폭풍우를 동반할 것이다
짐승처럼 혼자
사람들 사이를 헤맨 나는
무릎걸음으로 지나간 시간을 추억했다
뼈 속까지 찬 허기를 꾹꾹 밟으며
아버지, 풍으로 쓰러진 집에 가지 못했다
내 안엔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짐승처럼 산다
먼 곳에서 어둠은
새벽안개와 자리를 바꿀 것이다
어떤 애증도 나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질긴 가죽은 자주 발톱을 세웠다
사거리에 당도할 때마다
모진 마음은 천근만근의 사지를 머뭇거렸다
어머니, 홀로 아비 돌보는 상도동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 강을 건너야 한다
멀리, 밤새 미쳐 놀아났던
네온사인이 눈물빛처럼 어룽거리고 있었다
나무는 당돌하게도 옷을 홀딱 벗었지만
사람은 숨길 것 많아 한 겹씩 더 껴입는 바람부는 계절 11월이네요.
부끄러운 게 많은 사람은 다 벗지는 못하지요.
그렇게 떳떳하고 당당하지는 못하지요.
생이 마냥 누추해지는 한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추억이란, 어둠 속으로 제 추운 그림자를 밀어넣는 일,일까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11월은 모두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겨울로 가는 길로 담담히 들어섭니다.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달 11월은 마음이 가장 가라앉는 달,
짐승처럼 혼자 사람들 사이를 헤매다닌 지나간 추억은 아파도
서둘러 강을 건너야 합니다. 텅 빈 황량함으로 어둡고 춥더라도
가야할 그곳에 가야합니다.
11월의 이미지는 대부분 쓸쓸하고 아프네요.
다가올 겨울이 혹독해서일까요. 그러나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만한 눈동자들'*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 <11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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