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뚝지/이성복

서해기린 2013. 2. 23. 15:25

    

 

 

 

 

 

   1

 

  울진 앞바다 깊은 바위틈에 물고기 뚝지가 산다 눈도 입도 멍청하게 생긴 수컷이

저만큼 멍청한 암컷의 배를 만지고 쓰다듬고 자꾸 눌러서 희부연 알덩어리가 뭉게

뭉게 쏟아지면, 그 위에 수컷은 밀린 오줌 싸듯이 정액을 쏟아 붓는다 엉겹결에 수

정이 끝나면 막무가네로 수컷은 암컷을 밀어내고 제 혼자 배를 까뒤집고 끈끈이 주

걱 같은 지느러미로 흐느적흐느적 산소를 불어 넣어 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마

시지 못하고 온몸이 쭈그러들어, 쭈그러진 살갗 빼곡히 꼼지락거리는 기생충이 피

를 빨아도 떼어낼 생각도 않고, 삼십 일이나 사십 일 斷腸의 세월이 끝나고 올챙이

꼬리 같은 새끼들이 어리광 부리며 헤엄쳐 나오면 그제야 수컷은 깊은 숨 한번 들이

킬 여가도 없이 숨을 거둔다 물론 그 전에라도 배 출출한 무적의 무법자 대왕문어가

수시로 찾아와 육아에 바쁜 수컷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다

 

    2

 

  때로 수컷 뚝지가 쫓아내도, 쫓아내도 떠나지 않는 암컷 뚝지를 기어코 밀어내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떠나려고 버둥거렸는지는, 혼자서 풀이 죽어 떠나가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대왕문어의 밥이 된 다음에야 알 수 있다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엔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알들이 무더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

라도 할 거지, 바보야

 

    3

 

  또 어느 때는 수컷 뚝지가 눈 껌벅거리며 쉬임 없이 지느러미 놀려 가지런한 알들에게

산소를 불어넣어 줄 때, 제 짝을 못 구한 암컷 뚝지가 두리번거리며 찾아와 연애 한번 하

자고, 한 번만 하자고 졸라대지만 수컷은 관심이 없다 아예 쳐다도 보지 않는 수컷은 막무

가내로 암컷을 밀어내지만, 그것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치근덕거렸던가는 그 또한 대왕문

어의 밥이 되어 뱃가죽 터지고 사지가 너덜거려야 알 수 있다 아무도, 아무도 애무해주지

않아 쏟아보지도 못한 알들이 무더기무더기 깊은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4

 

  뚝지만 잡아먹다가도 영 입맛이 없고 괜시리 성질 더러워지는 날에는 대왕문어 두 마리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덤비다가 두 마리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죽음이 죽

음을 잡아먹으려다 죽어버린 것이다.

 

     -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  2013년 1월

 

 

 

 

 

 

이성복 시인의 새 시집 ,  <래여애반다라>가 지난 1월 새로 나왔다. 10년만에 내는 일곱번 째 시집이다.

같이 시를 배우던 문우가 李 시인의 제자로 들어가면서 저자의 싸인까지 받아온 시집을 선물해 줬다.

선물로 시집을 받으면 왜 그리 좋은지.

 

 

<래여애반다라>는 옛 신라의 향가인 풍요風謠의 한 구절이다.

 '오다, 서럽더라' 來如哀反多羅로 해석되며 우리 삶의 서러움을 노래했다.

대체로 이성복 시는 내게 어렵다. 관념적인 시는 더 그렇다.

그 중에 이야기체로 된 시 몇 수는 어렵지 않게 다가오며 서럽고 또 서럽다.

바로 '뚝지'다.  가슴이 먹먹하고 짠하다.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할 거지, 바보야

수컷 뚝지의 말이 가슴 한켠에서 오래 머물고 있다.

 

뚝지란 녀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검색해 보니 바다에서 노니는 이미지는 하나도 없고 불행히도 횟집 수족관이나

낚싯줄에 걸린 것들, 잡혀와 소쿠리에 들었거나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기 전 도마나 접시에 있는 것들 뿐이었다.

배가 불룩하고 멍청하게 보이기도 한다. 

 

생긴 것과 달리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는 뚝지의 삶은

그래서...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 오다, 서럽더라! ㅠㅠ

 

 

 

 

 

 

                                                                                                     

                                                                                                           뚝지-울릉도에서는 도치라고 불림

 

 

 

 

 

이성복 새 시집…서러움의 역사와 넘어섬의 삶

10년 만에 일곱 번째 시집 '래여애반다라' 출간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 향가를 부르던 천삼사백 년 전의 시절에 신라 인들은 서러움을 노래했다. 영묘사(靈廟寺)의 불상을 만들면서 여럿이 함께 불렀던 풍요(風謠)는 이렇다.

'래여래여래여(來如來如來如)/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애반다의도량(哀反多矣徒良)/공덕수질여량래여(功德修叱如良來如)'

'오다 오다 오다/오다, 서럽더라/서럽다, 우리들이여/공덕 닦으러 오다'

시인 이성복(61)이 10년 만에 내놓은 새 시집 '래여애반다라'는 이 풍요의 한 구절에서 왔다. 그 시절에도, 지금도 생의 허리춤을 친친 휘감고 놓지 않는 서러움에 대한 이야기다.

"추억의 생매장이 있었겠구나/ 저 나무가 저리도 푸르른 것은,/ 지금 저 나무의 푸른 잎이/ 게거품처럼 흘러내리는 것은/ 추억의 아가리도 울컥울컥/ 게워 올릴 때가 있다는 것!"(시 '來如哀反多羅 1' 중)

'오다, 서럽더라'로 해석되는 '래여애반다라'를 시인은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로 풀었다. 원할 겨를도 없이 생을 부여받은 인간이 차례로 다가오는 시간을 살아내는 과정의 압축이다.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는 존재가 비단처럼 펼쳐지는 시절로 넘어간다 해도 서러움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옆구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서러움을 분무기 삼아 주름진 비단을 펴나가는 순간에 인간은 고통을 한걸음 넘어선다.

"그리고 또 가시나무에/ 주저앉아 생각한다./ 사랑이 눈이었으면 애초에/ 감아버리거나 뽑아버렸을 것을!// 삶이여, 네가 기어코/ 내 원수라면 인사라도 해라,/ 나는 결코 너에게/ 해코지하지 않으리라"(시 '來如哀反多羅 5' 중)

10년 전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은 시 '밤 오는 숲속으로'로 닫혔다. "내가 세상에 침 뱉고 누런 가래/ 억지로 끌어올려 마구 퍼부어도/ 밤 오는 숲 속으로 마저 들어가지 못한/ 저 산길의 한 자락은 어쩔 수가 없다". 고통스러운 생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고백이다.

생의 서러움과 서러움을 끌어안고 넘어서는 일로 건너간 시인은 시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로 새 시집을 덮었다. 향가 '찬기파랑가'에서 서리를 모르게 가지 드높던 잣나무는 시인의 마지막 시에서 잠잠히 홀로 선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중략)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 제 곁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

문학과지성사. 158쪽. 8천원.

nari@yna.co.kr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밥바라기 추억/장하빈  (0) 2013.03.26
3월/ 나 태 주  (0) 2013.03.18
김효만씨 무릎 까진 날/이진수  (0) 2013.02.08
냇물에 철조망/최정례  (0) 2013.02.01
천장호에서/나희덕  (0) 2013.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