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미 수필 & 산문

날것에 취하다

서해기린 2017. 4. 7. 01:34

 

 

 

 

날것에 취하다

                                                

 

 

정상미

 

 

 

애기똥풀이 노란 등불을 켰다. 환해진 금오지를 돌아 채미정쪽으로 들어서자 계곡을 따라 난 오솔길이 정겹다. 키 큰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예쁘고 대나무 잎들이 서로의 몸을 부비는 소리가 사랑스럽다. 죽순이 몇 개나 올라왔는지 살핀다.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으며 징검돌 사이를 흐르는 계곡의 노래를 들으면 행복해진다. 흠흠… 갑자기 혼미해진다. 나를 휘감는 투명한 실타래들이 내뿜는 향기, 나는 둥실 구름 위로 오른다.

 

나를 취하게 하는 풋것들, 이 익숙한 날것들은 어디서 오는가. 눈물이다. 잘려진 풀들과 어린 나무들이 흘리는 물, 우윳빛 같고 피 같은 눈물에서 온다. 인부들이 예초기로 풀을 깎고 어린 나무들을 자르고 있었다. 죽어가는 날것들은 진한 향기를 뿜던가. 나는 이대로 있고 싶다. 오래 여기 서서 음미하고 싶다.

 

어느새 나는 앨리스가 되어 향기로운 숲의 나라를 걷고 있다. 풀잎마다 제 향기를 뽐내며 유혹한다. 잘려나간 나뭇가지들, 툭툭 떨어진 모가지들이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며 향내를 피워낸다.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마시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초록빛 관능, 이제 나는 초록으로 차오른다. 이대로 까무라쳐도 좋을 풋것들과의 연애는 진하다.

 

어릴 때 우리 집에는 누에를 키웠다. 잠실에서는 쏴아 쏴아 소나기 소리가 났다. 누에들이 잠박에서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는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누에가 한잠 두잠 자고 굵어지면 아버지는 뽕을 가지째 쳐서 지게에 지고 오셨다. 그때 잘린 뽕나무 가지에서도 눈물과 향내가 났다.

 

어떤 가지는 오디가 다닥다닥 붙어 있기도 했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오디를 따 먹고 뽕 냄새를 맡았다. 오디를 먹으면 입 언저리와 손가락이 시커멓게 되기 일쑤였다. 한 번은 잠실 앞에 놓인 연탄화덕에 걸려 넘어졌다. 뽕나무 가지에서 흘린 눈물이 내 발목이라도 잡았던 것일까, 내 눈을 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내가 나무의 날것에 취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때부터였을 게다. 나는 뽕나무 향내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도랑 위쪽으로 가면 버들강아지가 많았다. 버들강아지가 보송보송한 솜털을 내밀면 봄이 온다는 거였다. 주흘산에서 내려오는 봄물이 버들개지 줄기에 스며들었다. 가지를 꺾어 칼로 자르면 핑그르르 돌다 맺히는 나무의 눈물이 보였다.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면 즙이 배어나왔고 생나무 맛이 났다. 삑삑 불어대다가 잘근잘근 씹어보았다.

 

자라면서 오빠들과 종종 산에서 놀았다. 칡뿌리를 캐서 씹어보기도 하고 솔가지를 꺾어서 껍질을 벗기고 즙을 빨아먹어 보기도 했다. 씁쓸한 칡뿌리와 달작지근한 솔가지가 서로 맛은 달랐지만 진한 향이 좋았고 뭔가 비슷한 나무의 즙이란 독특한 향과 맛이 있었다.

 

가끔 집에서 키우는 벤자민을 자른다. 웃자란 가지를 쳐주는 것이지만 일부러 부지런을 떨며 한다. 벤자민은 젖 같은 눈물을 찔끔 흘린다. 뽕나무나 칡뿌리 같이 향기롭진 않지만 잘린 가지를 코끝에 가져가면 어김없이 흐르는 나무의 DNA가 느껴진다. 그러면 그것은 뽕나무를 부르고 오디를 부른다. 버들피리 소리가 들리고 칡뿌리와 솔가지도 살아나온다. 나는 또 취하고 낙원에 든다.

 

나무의 즙에는 나무의 고향 냄새가 묻어나고 나무 특유의 맛이 난다. 땅에서 뿌리가 빨아올린 물이며 나무의 살과 몸을 지나온 피이자 눈물이다. 뽕나무에서 시작해 버들피리를 거쳐 칡뿌리와 솔가지로 이어진 내 날것들의 이력이 오늘은 우산고로쇠로 피어난다. 울릉도에서 배달되어온 나무의 눈물을 한 모금 마시자 나는 에덴동산의 이브가 된다.

 

꺾일 때마다 어디선가 꽃을 피우는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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