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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이화령
정상미
사람이 자주 지나가면 풀밭도 산도 길이 된다. 어떤 길은 평탄하고 어떤 길은 험한 고개로 이어져 구불구불하다. 길과 함께 이야기가 생겨나고 그 이야기는 편한 길보다 험한 길에서 더 많이 태어난다. 잊을 수 없는 길이 있으니 문경과 괴산을 이어주는 고갯길, 참으로 강심장을 지닌 사람들만 다닐 수 있다는 이화령이다.
도로 사정이 좋아지기 전에는 문경에서 충북이나 경기, 서울로 가려면 굽이굽이 낭떠러지가 이어지는 공포의 이화령을 넘어야 했는데 눈이 오면 초비상이었다. 아버지께서 공무원이라 더 그랬는지 몰라도 그럴 때면 문경의 관공서는 총동원령이 내려져 모두가 이화령으로 달려가 눈을 치우거나 염화칼슘을 뿌리고 모래를 쏟아부었다. 그런 날은 으레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곤 하시던 아버지는 눈 오는 날을 싫어하셨다.
이화령은 영화를 찍는 장소로도 유명해서 주로 자동차 사고가 나는 장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불타는 차를 찍는 단골 장소로 애용되었다. 나중엔 사람들이 워낙 조심하다 보니 오히려 다른 데보다 사고가 적었다고 하지만 나는 서울에 직장이 있어 집에 오갈 때마다 이화령에서 간이 콩알만 해지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결혼 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며느리 될 사람의 부모와 사는 집이 궁금하시다 하여 서울에 사시는 시부모님, 그러니까 당시는 예비 시부모님을 모시고 문경 집을 향해 가는데 그때 남편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어서 시부모님이 시외버스 앞좌석에 나란히, 나는 뒤쪽에 혼자 앉아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갈 때 멀미를 하던 시어머니의 낯빛이 점점 이상해지더니 이화령 정상쯤 이르자 하얗게 질려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되었다. 그때 수지침을 잘 놓으시는 시아버지가 평소 가지고 다니시던 침으로 시어머니에게 여기저기 침을 놓아 위기를 벗어났던 기억이 난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 시어머니는 그 후에도 산도 산도 어찌 그리 많고 험하던지 두 번 다시 못 가신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결혼식은 서울에서 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한겨울이라 결혼 전날 밤에는 모두 다 눈만 내리지 말라고 빌고 또 빌었다. 눈이 많이 오면 이화령을 넘을 수가 없어 부모님과 하객들을 태운 버스가 서울로 갈 수 없으니까 말이다. 운 좋게도 눈은 내리지 않았고 덕분에 결혼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결혼 후 미국으로 들어가기 전 남편과 함께 친정집을 다녀오는 길에 나는 이화령에서 평소보다 훨씬 심한 멀미를 하고 겨우 살아왔는데 나중에 병원에 가보고 큰 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남동생 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데 이화령에서 앞서 가던 버스가 거북이처럼 천천히 운전을 했다. 동생이 추월하려 하자 버스 기사는 우리 차를 막고 또 막고 그러다 낭떠러지 쪽으로 밀어붙여 우리 일행은 하마터면 천길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통 승용차가 먼저 지나가도록 큰 차들이 배려하기도 하는데 그 버스 기사는 고갯길이 다 끝나는 지점까지 계속 방해 운전을 하며 약을 올렸다.
위험 지역에서 추월을 시도한 동생도 그 기사도 끝까지 신경전을 벌이는 통에 일반도로로 내려올 때까지 나는 내내 가슴을 졸여야 했다. 지금은 다행히도 터널이 생겨 두려움에 떨거나 멀미할 일도 없고 눈이 와도 큰 걱정이 없지만 그때는 정말 위험한 길이었다.
누구는 결혼을 하러 이화령을 넘고 누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눈물로 넘었을 고개, 어떤 이는 취직을 위해 넘고 어떤 이는 큰 병원에 가려고 또 어떤 이는 물건을 잔뜩 싣고 장사를 하기 위해 이화령을 넘었을 것이다. 저마다 크고 작은 사연을 하나씩 안고 넘어가던 애환이 깃든 고개를 할머니는 이우리(문헌에는 이유릿재)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그것이 '너무 험해서 여럿이 어울려 넘어가는 고개'라는 걸 알았다. 요즘도 이화령 터널을 지날 때면 이유릿재에서 고사리나 산나물을 뜯어오곤 하시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고향 친구들과 만나면 종종 이화령 얘기를 한다. 지난 6월 중학교 동창회가 끝나고 우리 친구 몇몇은 문경새재 입구를 출발해 걸어서 이화령까지 갔다. 각자 무서웠던 경험담을 얘기하며 옛날을 떠올렸다.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끝이 없었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꿈과 절망도 같이 넘었을 고개, 이화령이 늘 무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시사철 모습이 바뀌는 발아래 골짜기와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며 컵라면을 먹기도 하고 달달한 믹스커피를 마시며 산바람 속에 들어보는 맛도 이제는 다 한때의 추억으로 남아 그립기만 하다.
[백화문학] 47집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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