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길상호
이번엔 반신불수의 집을 택했습니다
고양이 셋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이런 집 말고 소개할 곳이 없다고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더군요
한쪽 방은 죽어 싸늘하고 딱딱하고
다른 방도 오래 앓아 수척해진 상태였는데
균열과 곰팡이와 결로가 뒤섞인 벽,
그 몹쓸 쓸쓸함에 발목 잡히고 말았습니다
집은 전체적으로 낡고 늙었지만
어쨌든 부드러운 인상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방과 아픈 방을 건너다니다 보면
기막힌 이야기가 태어날지도 모르지,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세들어 살던 당신도
상처투성이 집이었습니다
수리해 놓으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
그 집이 그래도 편안했던 건
어떤 울음에도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고양이들은 이번 집에서도 야옹 야옹
벽마다 근사한 무늬를 그리며 잘 지낼 것입니다
사람의 잡념쯤이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점프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이제 계약은 끝났으니 다음 소식은
이사를 한 후에 천천히 적도록 하겠습니다
- 계간 『詩魔』시마 2020.06
길상호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
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외 3권.
사진 에세이 「한 사람을 건너왔다」
<현대시 동인상>. <김종삼 시문학상>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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