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계약 / 길상호

서해기린 2020. 9. 1. 19:21

서울 시립미술관 앞에서

 

 

계약

 

 

길상호

 

 

이번엔 반신불수의 집을 택했습니다

고양이 셋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이런 집 말고 소개할 곳이 없다고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더군요

한쪽 방은 죽어 싸늘하고 딱딱하고

다른 방도 오래 앓아 수척해진 상태였는데

균열과 곰팡이와 결로가 뒤섞인 벽,

그 몹쓸 쓸쓸함에 발목 잡히고 말았습니다

집은 전체적으로 낡고 늙었지만

어쨌든 부드러운 인상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방과 아픈 방을 건너다니다 보면

기막힌 이야기가 태어날지도 모르지,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세들어 살던 당신도

상처투성이 집이었습니다

수리해 놓으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

그 집이 그래도 편안했던 건

어떤 울음에도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고양이들은 이번 집에서도 야옹 야옹

벽마다 근사한 무늬를 그리며 잘 지낼 것입니다

사람의 잡념쯤이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점프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이제 계약은 끝났으니 다음 소식은

이사를 한 후에 천천히 적도록 하겠습니다

 

 

- 계간 詩魔시마 2020.06

 

 

길상호

2001<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

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3.

사진 에세이 한 사람을 건너왔다

<현대시 동인상>. <김종삼 시문학상>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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