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미 수필 & 산문

마음 비우기

서해기린 2011. 5. 17. 19:26

 

 

   

     

 

  마음 비우기 

 

   그는 꽃으로 나를 감동시킨 적이 별로 없다. 내가 그에게 꽃을 받아본 건 지금까지 딱 두 번이다. 첫 번째는  결혼 후 처음 맞는 생일날 그 것도 미리 시어머니께서 전화로 그에게 알려줘서 케잌과 함께 받았고 그 후론 생일이고 결혼기념일이고 간에 도무지 꽃이나 선물을 모르는 남자다. 선물이라야 출장길에 면세점 들러 사는 게 전부지만 그것도 요즘은 뜸하다.

   처음엔 귀걸이, 목걸이, 스카프, 향수, 립스틱 등  다양했다. 내 취향이 아닌 것도 있고 해서 다음부터 화장품을 사오라고 했더니 마누라 주름살 생기는 게 싫은지 링클케어 화장품만 자꾸 사왔다. 미처 다 쓰지도 않았는데 한 종류만 계속 사오니 재고가 쌓였다. 게다가 카드로 긁어서 다음 달 생활비에서 어김없이 빠지는 게 아닌가. 이제 사오지 말라고  한소리 했더니 그 말은 또 얼마나 잘 듣는지 진짜 사오지 않는다. 

  생일도 기념일도 내가 미리 말을 하지 않으면 아예 잊고 그냥 지나간다. 한동안은 많이 서운했다. 하다못해 내가 미리 예고를 해서 챙겨먹게 되었다. 그러자 상품권이나 현금으로 주며 사고 싶은 것 사라고 하거나 월급을 몽땅 마누라에게 통장으로 차압당하니 거기서 꺼내 알아서 사란다. 그리고는 어디 가서 외식밖에 할 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부부사이가 점점 건조해지는 것 같다.

   출산을 두 번이나 했지만 한 번도 꽃을 사주지 않았다. 첫 애는 그의 미국유학시절에 낳았다. 인근에 사는 시누이 가족도 병원에 와 주었고 친하게 지내던 한국유학생 부인들이 와서 축하해 줘 그럭저럭 모르고 지나갔다.

  둘째는 구미에서 낳았다. 당시 구미는 나에게 낯선 곳이었다. 밤 9시쯤 병원에 가서 그 밤에 애를 낳고 다음 날 하루를 지내니 열도 없고 건강하다며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병실에 제대로 있었던 건 하루였으니 짧긴 짧았다. 서울에 사는 시어머니도 친정 식구들도 퇴원 후에 오겠다고 했다. 병실을 둘러보니 나만 꽃바구니가 없었다. 다른 산모들에겐 남편이나 남편 회사에서 보낸 축하 바구니가 있었다. 얼마나 부러웠던지 섭섭한 마음에 두고두고 바가지를 긁었다.

  몇 해 전인가 결혼기념일에 두 번째 꽃바구니가 카드와 함께 배달되었다. 카드엔 ‘처음 결혼할 때처럼 어쩌고저쩌고…….’ 감미롭고 로맨틱하기 그지없는 멘트였다. 한눈에 그가 직접 쓴 건 아니고 꽃집에서 알아서 보내준 것임을 알았다. 소위 결혼기념일용 멘트다. 물론 그가 들어보고 골랐거나 알아서 하나 보내 달라고 했을 게다. 그토록 간지러운 멘트를 직접 쓸 위인은 못되지만 엎드려 절 받긴 했어도 기쁘긴 했다.

  결혼할 때의 초심도 생각났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아무래도 꽃바구니가 너무 커서 돈 생각이 절로 났다. 한겨울에 저 정도면 꽤 비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엔 딱 만 원어치만 사오라고 했다.

    여전히 남편은 꽃을 살 줄 모른다. 두 번째 꽃바구니를 받았을 때 지나간 것과 앞으로 있을 것을 다 사줬다고 한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그래서 그렇게 큰 꽃바구니를 보냈나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아무튼 남편은 자기 생일은 물론이고 누구의 생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바빠서 그런지 성격이 그런 건지는 정녕 알 수 없다. 여자 마음을 그토록 몰라주는 것이 답답할 뿐이다.

  꽃을 사 달라 하기도 지쳤다. 이젠 그러려니 하고 산다. 가끔 한 번씩 같이 외식하고, 영화보고 배드민턴치고 등산도 하니 그걸로 만족하자고 나를 다스린다. ‘참! 주말에 설거지나 청소도 한 번씩 해주는구나.’ 특히 명절에는 그가 며느리들 고생했다고 시동생 데리고 청소와 설거지를 도맡아 해준다.

  어느 설날이었다. 차례 후 온 가족이 모여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고 세뱃돈이 오간 뒤에 설거지를 하려는데 그가

  “엄마 며느리들 수고했으니 같이 나가서 영화나 보고 오세요. 설거지는 아들들이 할게요.

  했다.

  “정말? 우리 그럴까? 어머님 그렇게 해요.”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

  “우리 아주버님 최고!”

  “그래 우리 큰 아들이 그렇게 하라니까 같이 나가자”

  두 동서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주로 집에만 계시던 어머님도 함박웃음이었다. 그때 우리 네 고부는 모처럼 밖에 나가서 영화도 보고 참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알게 모르게 마음 써 주는 그가 고마운 생각이 든다. 꽃이 다 뭔가. 가려운 데 긁어 주듯 힘들 때 진정으로 생각해 주고 도와주는 것이 최고 아닌가. 마음을 살짝 비우니 별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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