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개가 물어뜯은 시집 / 칠일 째 칼날 / 조경선

서해기린 2021. 4. 26. 17:30

♤♧ 
 
  개가 물어뜯은 시집 / 조경선 
 
 
  우편으로 배달된 시집을 옆집 개가 물어뜯고 있다
  제목은 찢겨져나갔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시 제목이 반쯤 남아 땅 위에 너덜거린다 
 
  한 끼에 9,000원짜리 독상 
 
  침 흘리고 먹다 버린 첫 장 시인의 말이
  마당에 흩어져 있다
  귀퉁이 구겨진 시인의 얼굴은 웃는다
  시집을 먹어치운 개가 맛을 아는지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꼬리를 흔든다  
 
  배불리 먹었을까 
 
  씹어 넘기다가 맛있는 부위만 골라 핥았을까
  유명한 견이니
  겉장만 보고 가려서 맛보았겠지
  간신히 찾아낸 이름 한 글자와 제목이
  대문 앞에 적멸로 앉아 있었다 * 
 
 
*장인수 시집 《적멸에 앉다》인용 
 
 
♤♧ 
 
  칠 일째 칼날 /  조경선 
 
 
  소한의 눈발이 명부전 마당을 보름께 쓸고 있다
  첫 날을 집어넣을 때
  천년의 숨결을 참는다
  나무는 칼날을 밀어내고
  온다는 애인은 끝내 오지 않는다
  처마 밑을 파고드는 바람에  칼끝이 아리다
  옹이는 상처가 아니라
  나무의 혈이다
  삼각칼이 힘줄을 당긴다
  나무가 숨겨놓은 산맥이 일어서고
  골짜기마다 경문經文이 넘친다
   발목 하나 새기는데 칠 일이나 걸리다니
  중생의 발이 푹푹 꺼진다
  양각과 음각을 조율하며 은밀한 곳까지 만지는데
  더  많은 업이 필요하다
  업을 만들지 못하면 말씀도 없다
  애인이 사라진 후
  칼은 한 획도 나아가지 못한다
  언제쯤 나는 본존本尊으로 돌아갈 것인가
  문드러진 젖은 발을 빼내기엔
  겨울이 너무나 깊다
  여전히 나의 혈관을 떠돌고 있는
  날선 칼날을 본다
   아, 심장에 박힌 글씨 

 

 

 

시집 《개가 물어뜯은 시집》 2021년 [달아실]

 

 

♤♧
조경선 
경기 고양에서 태어났다.
2012년 《포엠포엠》으로 시,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시조 등단.

시집으로 《목력》이 있다. 제6회 천강문학상, 제15회 시흥문학상, 제10회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했다.
josun42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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