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꽃 피는 공중전화, 드라이 아이스/김경주

서해기린 2012. 5. 26. 00:42

 

 

 

 

 

  꽃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 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 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드라이 아이스 / 김경주

_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 없는 법이다 *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 할 것


골목 끝 수퍼마겟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해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도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 들어가고 있다
귀신처럼.

*고대 시인 침연의 시중 한구절

 

 

김경주 시인의 시 중에 <아버지의 귀두>란 시가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19금, 표시가 뜨고 성인 인증을 받아야만 읽어볼 수 있다.

참 거침없이 적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는 짠하고 따뜻한 메세지가 있다.

공책에 필사해 둔 것을 옮겨볼까 하다가 말았는데 아버지 얘기를 시로 쓰려면 그 정도는 써 줘야

독자들의 시선을 끌 수 있을 거라는 얘기는 그냥 나온 게 아닌 듯 하다.

마음이 바뀌면 다음에 <성>이란 제목의 김수영 시와 같이 옮겨 볼 지도 모르겠다. 

 



 

눈시울은 은하수 쇄골은 선의 풍경 … 시인, 몸을 쓰다

[중앙일보] 입력 2012.01.16 00:00 / 수정 2012.01.16 00:59

김경주 산문집 『밀어』

김경주 시인은 『밀어』에서 몸에 얽힌 은유를 풀어낸다. 예컨대 복사뼈는 ‘발목에 고인 개울’, 보조개는 ‘사라지는 우물’, 목젖은 ‘금방이라는 단어의 체온’ 등으로 새롭게 명명된다. [사진작가 전소연]

한 번은 쓰겠거니 했다. 그가 ‘무릎의 문양’(2007)이란 시를 발표했을 때, 예견된 일이었다.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그가 몸의 한 곳으로부터 이 시를 길어냈을 때, 이 책은 예고됐다.

 김경주(36) 시인이 산문집 『밀어(密語)』(문학동네)를 엮었다. 책의 제목은 은밀하다. 비밀스런 제목은 그래서 이런 부제를 덧붙였다. ‘몸에 관한 시적 몽상’ 그래, 몸이다. ‘무릎의 문양’에서 예견됐던 그 몸의 시학이다. 시인은 몸과 관련한 몽상을 마흔여섯 갈래 펼쳐놓았다. 철학·인류학·사회학적 진술을 끌어오면서도, 끝내 시적인 문장으로 넘실대는 글들이다. 그 문장은 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예컨대 그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발가락은 아래 하의 세계이다. 발가락은 아래의 세계에 다정하게 모여 산다”고 적고, 핏줄을 더듬으며 “피는 육체를 버리고 싶어 움직인다. 피는 몸속으로 숨어버린 살이다”고 쓴다.

 눈의 기슭에선 이런 문장이 태어난다. “눈망울은 몸 안의 천문대이다. 눈시울은 눈망울 아래에 퍼져 있는 엷은 은하이다.”

 이 책은 어떤 뭉클한 허구다.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존재하는 몸을 증언한다. 시인은 우리의 이성이 닿지 않는 곳에서 몸을 몽상한다. 논리와 해석이 감당할 수 없는 책이므로, 시인의 해명이 필요했다. 그는 산문집 탈고와 동시에 중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중국 윈난성(雲南省)을 떠돌고 있는 시인과 e-메일로 교신했다.

김경주의 쇄골. 그는 “쇄골은 육체가 기적적으로 이루어낸 선의 풍경”이라 적었다.
 -몸에 관한 책을 쓴 까닭은.

 “평소 몸을 관통해야 시가 나온다는 걸 느끼곤 했다. 몸에 대한 시적 몽상을 우리의 이해와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까지 밀어가고 싶었다. 다른 종류의 시 쓰기라고 할까. 몸을 관통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난해한 대목이 적잖은데.

 “귓볼·머리카락·발목·쇄골…. 몸의 각 부위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기묘하고 신비스럽다. 몸을 이루는 언어의 묘한 질감을 시적으로 몽상해가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매개로 다양한 낭독극과 시극 등을 구상 중이다.”

 그는 자주 “시적인 텍스트”란 말로 이 책을 설명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 책을 굳이 산문집이라 부를 까닭은 없을 테다. 각 장마다 문장을 어긋나게 배치한 것도 시적 효과를 노린 것이리라.

 -시라 불러도 무방할 글인데.

 “맞는 말이다. 장르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된다. 장르와 경계는 원래부터 불필요하거나 멀리 있는 개념이다.”

 -제목 ‘밀어’가 품고 있는 비밀은.

 “이 책은 언어에 대한, 몸에 대한, 몽상에 대한 비밀이다. 문학은 모두 은밀한 언어의 자연이며, 시는 그 언어들에 새로운 비밀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몸을 주제로 택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비밀을 새롭게 보는 연습을 하게 됐다.”

 이른바 ‘몸의 시대’다. 사상이든, 예술이든, 과거 ‘정신(영혼)’에 가려졌던 몸(육체)의 가치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본디 시도 몸을 통해 발견되는 것. 시가 은밀하게 몸을 건너오는 순간, ‘밀어’가 피어 오른다. 몸의 파동으로부터 언어를 탐미할 때, 그 몸은 시가 된다. 몸에 관한 시적 몽상을 풀어내면서 김경주라는 몸은 시로 둔갑한 듯했다. 김경주의 몸이 시라면, 당신과 나의 몸도 그러할 것이다. 태곳적부터 몸은 시혼(詩魂)의 서식지였다.

◆김경주=1976년 광주광역시 출생.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06년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시집으로선 이례적으로 2만 부 가까이 팔리면서 ‘스타 시인’으로 떠올랐다. 시집 『기담』『시차의 눈을 달랜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