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자화상/서정주

서해기린 2012. 4. 21. 02:44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애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앞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시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아네모네 꽃

 

문우들과 이 시의 한 행

                        스물 세 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를 가지고

모방시를 써 보기로 했다.

나는,  OO해 동안 나를 키운 건 결핍,이라 했다. 

어떤 이는 비,라 하고

어떤 이는 구름,이라고도 했다.

햇빛, 사랑, 같은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볕과 사랑 없이 어떻게 커 왔을까마는

 

시는 만족하면 태어나기 어려운가 보다.

행복하면 좋은 시가 안되나 보다.

누구나 비바람,  눈보라 맞으며

상처 입으며 커가는 것인가 보다.

 

모 CF는 이를 인용해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햇반이다,고도 했다.

밥 같은 기본적인 것 말고

진실로 나를 키운 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