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가시는 생각, 오시는 생각/한영옥

서해기린 2012. 4. 12. 19:47

 

 

 

 

 

 

저 생각이 제 몸 다녀가십니다

제 몸 고마웠다 하시며 가십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오셨습니다

가시는 생각과 오시는 생각이

제 몸 안에서 고요히 마주치셨습니다

제 몸은 여름 과실인 것 같았습니다

 

오시는 생각이 가시는 생각 떠밀지 않고

핥으며 수박 냄새, 참외 냄새 맡을 때

제 몸 다녀가신 모든 생각의 머리채

올올이 살아 오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많습니다

찐득하게 엉겨붙지 않도록

몸 빗기는 마음 하나만 믿고 있지요

또 하나의 생각을 받는 새로운 봄날,

울타리 아래 파란 냉이싹 그냥 못 두고

주섬주섬 또 보자기 펴고 맙니다

 

-한영옥 <비천한 빠름이여> 문학동네-

 

 

한영옥(韓英玉) : 시인, 교수

            성신여대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현재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집 '안개편지', '비천한 빠름이여', '아늑한 얼굴' '다시 하얗게'외.
          저서 '한국여성시의 이해와 감상'(공저), '한국현대시의 의식 탐구', '한국현대시의 場' 외.
          한국예술비평가협회상, 천상병시상, 최계락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4월 1일 금오산 자연학습원에서 본 히어리,라는 낯선 꽃 

오늘 어떤 생각들이 오시고 가셨나요.

숱한 생각들이 몸을 다녀가지요.

봄에 생각의 왕림이 많을까요, 가을에 더 많을까요.

화려한 가운데 느끼는 쓸쓸함과

텅 빈 가운데 맞는 충만함 같은 것 생각해 보셨나요.

이상하게도 정반대로, 그렇게 느낄 때가 있어요.

나이들어 갈수록 자주 그러네요.

그러나 자유롭게 저 생각이 가면 이 생각이 오도록 

마주치기도 하도록 내버려 둘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