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할 일
가만히 앉아 숨쉬기
모든 구멍에서 나오는 구리고 비린 나를 들이 마시기
제 못난 곳을 악착같이 감추어오다 감춘 사실마저 낱낱이 들키기
생긴 대로만 앉아 있어도 저절로 웃기는 놈, 비열한 놈, 한심한 놈이 되기
머리통에 피가 몰리는 기억을 꺼내 터진 뇌혈관 다시 터뜨리기
단단한 벽으로 된 입과 귀에다 깨지기 쉬운 간절한 말을 쑤셔 넣기
욕이 되려는 분노를 억지로 우그러뜨려 누르고 밝게 웃으며 대답하기
터져 나오는 비명을 녹여 나에게만 들리는 진한 한숨으로 바꾸기
숨구멍 막는 끈끈한 가래 같은 숨을 조심조심 뚫어가며 숨쉬기
긁으면 더 가려워지는 가려움, 긁느니 잘라내고 싶은 가려움을 긁어 키우기
고삐를 잡아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안오는 잠을 강제로 자기
그냥 있기만 하기
-김기택-
파리
쓰다 말고 던져둔 시 「거미」위로
파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다리 많은 호기심이 발발거리더니
멈칫,
‘거미줄’이란 글자 앞에 선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
무엇엔가 옭아매인듯 꼼짝 못한다
파리는 갑자기 두 앞다리를 모으더니
싹싹 빈다
서 있어도 저절로 오체투지가 되는 몸으로
빌고 또 빈다
파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거미줄에서 몇 글자 건너
‘거미’라는 글자가 떡 버티고 있다
수성 잉크가 번져 글자마다 털이 돋아 있다
글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파리도 한 글자가 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김기택-
위의 시 두 편, 오늘 <함시사> 수업을 위한 추천시를 고르며 김기택 시인의 최근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에서
발췌해 보았습니다.「오늘의 할 일」을 보면 눈길을 끄는 '할 일'들이 많은데 쉬운 일도 있지만 중간 어느 부분부터는
참 하기 어려운 일들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웃음이 나다가 깊고 심오해지다가 다시 편해지는 것 같지만 마지막 행,
'그냥 있기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파리」는 그 재미있는 장면이 딱 떠오르는 게 웃음이 실실 나와서 가져와 봤습니다.
계사년(癸蛇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임진년(壬辰年)이 가더니 가만히 있어도 또 새해입니다. 나는
정말 가만히 있기만 했을까요? 알게 모르게 애쓰고 힘들고, 즐겁고 기쁘고, 보이게 보이지 않게 슬프고 아프고, 웃고
울고, 풀이 죽고 또 기운을 차리고,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영화를 보고 드라마에도 빠지고, 골목을 걷다가 수영도
하다가 쇼핑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풍경에 취하고, 밥을 먹고 싸우고…… 오랜 시간은 잠을 자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조금씩 주름살이 늘고 했겠지요. 올해는 어느 쪽이 더 무거워 기우뚱 할까요. 비슷하게 균형을 맞추며 갈까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귀한 것들이니 팔벌려 맞고 살갑게 대해주려 합니다.
지난 해 12월에는 이사를 했고 남편의 직장에 변화가 생겨 그는 오늘부터 천안의 한 회사로 옮겨 갔습니다. 막내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최소한 2년은 부득이 주말부부를 해야하네요. 누구는 '어떻게 하냐'며 걱정을 해주고 누구는
'신나겠다'며 자주 불러달라,고 합니다. 살아봐야 알겠습니다. ^-^
새해가 밝았지만 유난히 추운 겨울입니다. 눈은 또 왜 이리 자주, 많이 오는지요. 눈꽃세상은 더없이 맑고 아름답지
만 다니기가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닙니다. 피해농가가 속출하구요, 사람들이 나오지 않아 경기가 안좋다고 합니다.
눈 내리는 창가에서 낭만을 찾던 처음 여러날이 미안해지네요.
제 블방에 오시는 님들, 내일은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 될 거라고 합니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다니시고
계사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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