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Y를 위하여/최승자

서해기린 2013. 9. 16. 11:34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 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 Y를 위하여 / 최승자

 

 

 

 

 

 

 버림받아 본 여성, 낙태를 경험한 여성이 있을 것이다.  이 시를 대하면 그때의 씁쓸한 추억이 되살아날 것인가.

이 시는 우리나라 대표적 여성시로 뽑히는 페미니즘시다. 가을이 오고 곧 쓸쓸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세를 넓혀 올  것이다. 낙태의 현장에서 여성은 절대고독자일 터, 그보다 더한 고독이 있을까.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내 눈과 가슴은 이 부분에 오래 머문다.

 

   오 개새끼

못 잊어!

 

이 마지막 두 행에서 굳어져 버린다. 오래 더 오래 바라본다.

시인은 개새끼라고 욕하면서 그래도 잊지 못해 하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일 게다.

 

                                                                                                                  부추꽃

 

 

남자는 性성에 대해 써도 관대한 반면 여자는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고 간섭도 많다.

그 성적인 금기를 넘어선 몇몇 용감한 여성시인들 중의 하나가 최승자다.  이 외에 최영미, 김선우, 김언희가

이 대열에 서 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여성들은 조심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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