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자루 속에서/강문숙

서해기린 2011. 6. 27. 11:49

 

 

                                                                                                    베란다에 핀 자주달개비

 

자루속에서 /강문숙

 

자루의 주둥이가 풀리면서

묵은 완두콩이 쏟아졌다. 쪼그라든

껍질, 낟알마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채

견딜 수 없이 가벼워진 목숨.

아직도 구멍 숙에 코를 박고 있는 바구미들.

 

수많은 낮밤을 완두콩과, 완두콩을 갉아먹는

벌레들로, 자루의 속은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푸른 떡잎과 싱싱한 넝쿨손을 갉아 먹히면서

완두콩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벌레를 껴안고 사방으로 굴러가는 완두콩

자루가 해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무한천공을 떠다니는 지구 덩어리

거대한 자루속, 함께 들썩거리며

나도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완두콩과 벌레와 자루가 서로 껴안고 구를 때

삶은 굴렁쇠처럼 반짝이고 있다. 

 

 

 


 

 

 

강문숙

1955년 경북 안동 출생.
199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 <시·열림> 동인.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 『탁자 위의 사막』 『보고 싶다』(사진공동시집) 『따뜻한 종이컵』

 

 

 

 

 

 

 

 

*** 강문숙 시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시인의 특강을 듣고 감명을 받기도 했지요.

     완두콩을 갉아 먹는 바구미처럼

     나도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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