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
조경선
옆에 놓여 있는 컵이 하나여서 다행입니다
나도 그 감정이어서 다행입니다
둥글다는 것은 입술을 편하게 하고
일정하게 맛 들여진 곡선의 촉감들은
손끝으로 읽어 주고 싶어집니다
뜨거운 차를 수십 번 입에 댔다 떼는 사이
외풍이 옆자리를 떠올리다 스스로 식어지곤 해요
양손을 떠받힌 사기그릇이 처음부터 뜨겁지는 않아요
홀로 급하게 먹어 치우는 점심이 갈증을 불러와도
한 번에 들이키면 기억까지 데이고 말죠
매번 불투명한 속에 얼굴을 채워도
내 얼굴은 투명하게 보이지 않아요
살다보면 컵 속의 가라앉은 자들이 얼굴을 내밀지요
뜨겁고 차갑고 쓰고 달착지근한 입김들이
바닥에 엎드려 눌러 붙어 있습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컵 밑은
이유 없는 생채기로 흔들렸어요
컵하고 발음하고 나면 상처도 저 혼자 아물 것 같아
매일 순한 밤 속에 정갈하게 엎어놓지요
그래서인지 문양이 새겨진 바깥쪽이
자꾸만 청승맞은 빛이 되어 나를 봅니다
컵 하나만 기다려줘서 다행입니다
외로움을 마시지 않습니다 고요를 마십니다
-《열린시학》 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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