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폭설/류 근

서해기린 2016. 11. 11. 15:07

 

 

 

 

 

폭설 / 류 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류 근 시인

문경 출생. 중앙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2년 문화일보 등단

시집 『상처적 체질』, 『어떻게든 이별』이 있음

 

 

 

눈이 내리면 그립거나 아픈 기억들이 걸어 나온다. 눈은 추억을 하나씩 내려준다. 눈 오는 날에는 시인이 되기도 해서 혼자서도 옛사람을 불러내 속삭여본다. 밖에 나가 팔 벌려 내리는 눈을 맞아 보기도 한다. 동심으로 돌아가 눈길을 뽀드득거리며 걸어가면 어릴 적 마당에서 언니 오빠와 눈사람 만드는 모습이 떠오른다.

류 근 시인의 <폭설>은 떠난 사람들과 눈과 나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내 속에 들어가 온전히 내가 되었다가 나온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리’면 나를 떠나간 이들이 떠오른다. 애인, 아버지, 할머니, ... . 누구를 대입시켜도 젖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나를 버리고 간 사람에게 욕설처럼 눈이 내리면 시원해질 것 같다. 정말 시원해지는가. 길은 다 문을 닫아버렸으니 잊어버리기가 쉬워지기도 할 것이다. 눈은 지우개다. 길을 지우고 슬픔을 지우고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러나 어디 잘 지워지던가.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은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힌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이 흔들리다 떨어진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이별을 해왔으며 또 해야 할까. 결별의 예감 한 잎 흔들릴 때, 떨어지기 전에 최선을 다하지 못 했던 아쉬움, 아픔이 내 몸에 달라붙는다. 아버지는 암덩이가 목구멍을 막아 제대로 드시지 못하다 돌아가셨다. 할머니도 앞이 보이지 않고 주민등록증 없이 무적無籍으로 살다 가셨는데 나는 두 분 다 임종을 지키지 못 했다. 죄스러움이 정수리를 때린다.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는 내 마음을 대변한다. 아이들이 어려서 자주 아버지에게 가지 못했다고, 이역만리 바다 건너 있어서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보지 못했다고 변명 아닌 변명처럼 눈이 내린다. 가슴으로 서늘하게 내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좀 더 잘 해줄걸, 밀물처럼 후회가 들이닥친다. 몸속에 차가운 물길 하나 흐를 때, 아픔 끌어안고 살아야 할 때, 잊으라 잊으라고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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