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습(濕)/조경선

서해기린 2016. 11. 13. 17:22

 

 

 

 

 

습(濕)

 

 

조경선

 

 

 

1.

아내가 돌아오고 비만 나린다

모든 게 건조하다

나갈 때 손보다 들어올 때 손이 더 낯설다

실루엣은 나오지 않고

그림자가 며칠 째 칩거중이다

 

 

퉁퉁 불은 여닫이문과 문틀이

신경질적으로 달라붙는다

어디서부터 함부로 뒤틀렸나

힘껏 잡아당길 때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파르르 등 끝까지 치민다

 

 

그래, 뼈 속까지 닫았구나

문이 나를 꽉 물고 놓지 않는다

 

 

아내와 나는 여는 사람인가 닫는 사람인가

문은 끝내 열리지 않고

계절과 계절 사이 끼워둔 경첩이 먼 기척으로 남는다

 

 

2.

때를 놓치고 물밥을 먹는다

대문 밖 빗소리가 낯설다

구름이 쏟아낸 전말이

물기를 먹은 풀들과 함께 쓰러진다

저것은 불편한 고별사

목이 메이지 않는 건

비의 소관에서 이미 벗어났기 때문

 

 

어제 뱉은 말이 자꾸 집착으로 다가오는데

촘촘한 빗줄기 속 빠져 나갈 틈은 없다

마지막이 항상 처음이라 믿는다

저 발칙한 꼬리

살쾡이가 비린내 나는 내 처음을 물고 간다

 

 

당신이 돌보지 않는 눅눅한 밤을 지나

당신이 돌아보지 않는 새벽을 지나

당신에게 발각되고 싶은 아침이 있다

부재를 견디며 익사중이다

지금 난, 만수위다

 

 

-《 제15회 시흥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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