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컵/조경선

서해기린 2016. 10. 14. 00:27

 

 

 

 

 

         컵

                                             조경선

 

 

옆에 놓여 있는 컵이 하나여서 다행입니다

나도 그 감정이어서 다행입니다

둥글다는 것은 입술을 편하게 하고

일정하게 맛 들여진 곡선의 촉감들은

손끝으로 읽어 주고 싶어집니다

뜨거운 차를 수십 번 입에 댔다 떼는 사이

외풍이 옆자리를 떠올리다 스스로 식어지곤 해요

양손을 떠받힌 사기그릇이 처음부터 뜨겁지는 않아요

홀로 급하게 먹어 치우는 점심이 갈증을 불러와도

한 번에 들이키면 기억까지 데이고 말죠

매번 불투명한 속에 얼굴을 채워도

내 얼굴은 투명하게 보이지 않아요

살다보면 컵 속의 가라앉은 자들이 얼굴을 내밀지요

뜨겁고 차갑고 쓰고 달착지근한 입김들이

바닥에 엎드려 눌러 붙어 있습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컵 밑은

이유 없는 생채기로 흔들렸어요

컵하고 발음하고 나면 상처도 저 혼자 아물 것 같아

매일 순한 밤 속에 정갈하게 엎어놓지요

그래서인지 문양이 새겨진 바깥쪽이

자꾸만 청승맞은 빛이 되어 나를 봅니다

컵 하나만 기다려줘서 다행입니다

외로움을 마시지 않습니다 고요를 마십니다

 

 

-《열린시학》 2015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