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집 & 앤솔러지

《헉! 》- 현대사설시조포럼 앤솔러지 Vol 12 -1

서해기린 2021. 11. 27. 10:26

#사설시조 #현대사설시조포럼앤솔러지 Vol.12 #헉!


눈보라 수행 백 일 동안거 끝낸 덕장

저렇게 가지런히 진부령 겨울과 봄이 밤낮 한통속으로 얼다 녹다 하다가 눈뜬 채 놓쳐버린 바다도 길도 허공도 매달린 바람의 뼈도 얼다 녹다 하다가 입 벌린 채 삼켜버린 울음도 숨도 묵언도 텅 빈 허기의 꿈도 얼다 녹다 하다가

노랗게 풍화된 경전, 살 속에 빛을 켠다

- 박권숙, 『사설시조포럼 2019』「황태」 전문


저 팽팽한 울음의 마지막과 처음 사이

어둠을 토해내는 햇살의 분노 같은 여름의 천길 단애를 단숨에 건너뛰는 섬광으로 처리된 햇살의 분노 같은 제 귀를 잘라버린 미친 화가의 자화상을 핏빛으로 빠져나온 햇살의 분노 같은

울음의 크레파스가 모든 적막을 삼킨다

- 박권숙 『사설시조포럼 2020』「매미가 울 때」전문


일억 사천 만 년 동안 모자이크된 물의 얼굴

발목이 푹푹 빠진 시간을 잘게 잘게 햇빛 조각 나누고 있는 가시연꽃 창포 마름 자라풀 물억새 그 속에, 잘게 잘게 그림자 조각 붙이고 있는 논병아리 쇠물닭 청둥오리 큰고니 그 속에, 잘게 잘게 틈새 조각 다듬고 있는 농어, 잉어, 논우렁 말조개 소금쟁이 그 속에

그 속에
홀로 캄캄한
내 그림자 무 · 섭 · 다

- 박권숙 『사설시조포럼 2019』 「우포늪」전문


선인장이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햇빛도 물도 흙도 다다르기 전에 먼저 기도도 숨도 꿈도 다다르기 전에 먼저 생략된 우기 쪽으로 건기를 밀어내며 가시 손이 놓쳐버린 손톱들만 남아서

기억 속 사막 한 채를 할퀴고 핀 꽃 붉다

- 박권숙 『사설시조포럼 2020』 「손톱선인장」 전문



걱정 인형*
-박권숙

정용국


1.

소봇한 골목길을
그래도 잘 걸어왔다
둥글던 수상소감엔
만정이 가득했지

그늘꽃
육십 년 세월
울컥하고 스몄다

2.

마음에 걸리던 것
백비로 눌러두고
아삭한 시조밭에
꽃바람도 불러보자

새까만
오만 걱정들
인형에게 맡기고

*과테말라 속담에 나오는 인형으로 걱정을 말해주고 베개 밑에 두고 자면 다 해결해 준다고 함.

♤♧
현대사설시조포럼 앤솔러지
2021 Vol. 12
《헉!》이 '고요아침'에서 출간되었다.
책 제목 《헉!》은 테마 시조 '바람' 부분의 첫자리에 놓인 윤금초 시인의 시 제목이다.

윤금초 김영재 박영교 박기섭 박옥위 이지엽 염창권 장 재 신양란 김숙희 공영해 정용국 박희정 정평림 최성아 홍준경 문수영 노영임 고춘옥 변현상 김춘기 배우식 김윤숭 김영란 장은수 문경선 정황수 유순덕

위 28명의 시인이 참여했으며 회장인 정용국 시인은 첫머리에서 故박권숙 시인의 시를 소개하며 추모하고 시 <걱정인형>을 지어 고인에게 바친다.

나는 박권숙 시인을 2019년 1월에 문우의 신춘문예 시상식장에 축하해주러 갔다가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좀 뒷자리에서 잠시 뵈었을 뿐이지만 시인의 시와 인품은 참 좋게 평가되는 것 같다. 코로나 시국에 조용히 가시며 시조단의 큰 행사를 망치지 않기 위해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비공개로 해달라고 했다 한다. 60세의 아까운 나이에 지병으로 가셨다는데 참으로 안타깝고 시조단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박권숙 시인
1962년 경남 양산 출생, 1991년 중앙일보 로 등단. 시집 1993년 '겨울 묵시록' 1996년 '객토' 2001년 '시간의 꽃' 2005년 '홀씨들의 먼길' 2012년 '모든 틈은 꽃핀다' 2017년 '뜨거운 묘비'

♤♧

헉!
윤금초

그리하여 골골, 샅샅 광기 바람 몰아친다.

집채만 한 삼각파도 물이랑 끌고, 끌고 흉흉하게 솟구친다. 새하얀 포말들이 말갈기처럼 부서진다. 바다는 참을 수 없이 방파제 넘보다가 마구잡이 널을 뛴다. 난바다 혓바닥 날름 하늘 가녘 심한 凹凸 사이사이 요리조리 헤집다가 무슨 기미 몰고 오나, 서릿바람 음흉한 낌새 휘 휘 휘 몰고 오나? 차갑고 세찬 손돌바람, 사납고 매서운 고추바람, 눈 비 몰고 재우치는 흘레바람, 북녘 울짱 타고 넘는 얼굴 가린 뒤울이바람, 북만北滿 대륙 질러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마적 떼 황사바람..., 그 한때 한양 휘젓던 경화세족京華世族 무리 같던 '황금 개띠' 진보 꼰대* 어느새 꼬리 사리고 '빠짜' 돌림 호위무사 싹쓸바람 혼용무도昏庸無道 활개 친다, 어마무시 활개 친다. 칼바람 피죽바람 회리바람 돌개바람 무람없이 널뛰기라 그리하여 골골, 샅샅 광기 바람 몰아칠 때

저마다 제 샅을 잡고 헉! 회술레 한창인가?


*졸작 <꼰대들의 실루엣> 일부 재사용.


♤♧

소백산 큰 바람

김영재

소백산 큰 바람
내 등을 밀어주었다

비로봉 오르는 길 세상 사는 일보다 험하고 힘들다고 지친 등을 밀어주었다 정상에 올라 큰 소리 한번 치고 우쭐대며 태백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배낭 당기며
하산하라 타이른다


♤♧

산다는 거

박영교

산다는 거 뭐하는 거냐?
종족 보존의 법칙이냐?

바람은 피우지 마라 어떤 일이 있어도
그림만 함부로 자꾸자꾸 그리지 마라

커다란
발자취 밑엔
어수선한 큰바람 큰 그림이 엎드려 산다.

♤♧

바람의 출처

박기섭


시인은 외상 술을 먹고 봄 목련 꽃그늘에 거품오줌을 누고 세속도시 변두리 수챗구멍에 마른 침을 뱉고 눈 덮인 겨울 벌판을 홀로 서성이며 사라진 노래의 후렴구를 찾고

시인은 여름밤 은핫물에 멱을 감고 잡은 소고삐 놓은 채 멀찌가니 직녀의 낡은 베틀 소리를 듣고 속엣말 다 흩은 가을 억새밭머리 저문 강 노을에 타는 앞섶을 어쩌지 못하고

한사코 출처 모를 바람만 움켰다가 놓았다가


♧♤

바람

박옥위

태초 바람은 맑고 신선했으므로 신의 것이었다.

나뭇잎도 춤추는 산들바람에 꽃잎이 휘날리는 꽃바람에
한여름 시원하게 부는 골짝바람에 산바람 강바람 바닷바람
연분홍 치마를 살랑대던 봄바람은 그리운 바람이요

돌풍 태풍 허리케인은 풍을 달았으니 이름값을 하는데
요새 서울을 강타하는 황사바람은 중국은 모르는 바람이라

옛날엔 그 유명하던 치맛바람, 주먹바람이 최근 사부자기
잦아들었는데 돈바람은 여지없이 지금도 까불거리고
뭐 미투 라나, 섹스바람은 꼬리를 물고 일어나
세상을 오염시키고 정치꾼은 헛바람에 거짓바람
꿍꿍이 바람에 잡히고 손 선풍기 바람까지 일이 한참 나겠네
그래도 산이나 바다가 그립다고 달려가는데 거기도
코로나 바람으로 깽판을 놓는데

아 덥다 마!


뭐라 캐 싸도 이 여름, 에어컨이 없으면 우짜겠능교

♤♧

바람
이지엽


죽림리 바닷가에는 세상 모든 바람이 산다

실바람 남실바람 산들바람 잔물결의 살랑바람이면 좀 좋으랴
건들바람 흔들바람 된바람 화풍 질풍 웅풍 깊은 바람 거쳐
센바람 큰바람 큰샘바람 흔들리고 꺾이는 소용돌이 물보라더니
노대바람 왕바람 싹쓸바람 뽑히고 여귀산 산더미로 덮쳐오는 파도 파도여

다음날 천지개벽한 듯 말짱하게 웃는 햇살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