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설국열차를 지난 토요일에 조조로 보았다. 사전에 홍보가 많기도 했고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도 보았던 참이라 나는 기대치가 한층 높아져 있었다.
10년 전 봉감독은 홍대 부근 만화가게에서 프랑스 만화인 이 스토리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그는 선 채로, 단숨
에 끝까지 읽어내릴 정도로 매력적인 내용이었다고 그 순간을 회고한다. 그때부터 꼭 영화로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다는데 그 10년 사이, <괴물>과 <마더>를 내 놓으면서도 <설국열차>의 씨앗은 봉감독의 마음 깊숙한 곳
에서 점점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그의 영화 매 편에서 보편성을 거부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모든 예술 장르에 꼭 필요한 '창의성', '창조적'
이라는 말은 보편적이지 않은 것,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 경험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처음
내놓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설국열차>는 그런 SF, 액션 영화다.
처음 영화의 나레이션은 신선했다. 지금보다 수십년 지난 미래의 시점, 지구의 온도가 갈수록 높아지자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한 새로운 약품을 만들어 살포한다. 지구의 온도는 낮아진다. 그러나 약품의 과다사용으로 새로운 빙하기가 도래하고
생존자들만 태운 열차는 17년째 눈덮인 지구를 빠르게 달리며 순환하고 있다. 과학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의 설정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야기는 너무나 단순하게도 꼬리칸에서 맨 처음 엔진칸으로 이동해 가려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열차에서는 새 생명이 태어나기도 하고 죽어나가기도 한다.
열차라는 제한된 공간, 신 노아의 방주에 올라탄 사람들은 왜 목숨을 걸고 혁명에 뛰어드는가.
그건 열차의 칸에 따라 신분이나 계급이 달라 삶의 질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칙칙하고 어두운 장면이 너무 길어서 부담스러웠다. 영화인데, 감독 마음대로 만드는 것인데 싫고 말고가 어디 있을까마는,
중간 칸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장면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고 꼭 저렇게 해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 칸의 밝은 모습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내 성향이 얼마나 어둡고 칙칙한 것을 싫어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 영화 보는
순간도 견디기 힘들어 하니 말이다. 이 영화에는 곳곳에 과학이 숨어있다. 제한된 공간에서의 사람들 삶이 그대로 유지되려면
균형이 중요하다는 최고 권력자 윌포드의 말은 생태계에서의 피라미드 먹이사슬을 연상케 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적당
히 죽어줘야 한다는 사실, 자급자족하며, 17년째 엔진을 멈추지 않는 덜컹거리는 열차속은 현실의 이 세상과 대치된다. 꼬리칸은
빈민가의 힘겨운 세상이고 앞쪽의 향유층은 현실의 상류층 사회를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해 수많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듯이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다. 설원을 뚫고 달리는 열차에서도 그 혁명은 진행된다.
절대 권력자 윌포드를 우상화시키는 교실은 반도의 북쪽 세상 김정은 정권 그들 3부자를 연상케 한다. 이건 내 개인적 느낌인
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저 교실칸은 인성과 도덕, 양심은 뒤로 한 채 물질만능과 권력, 일등주의만 부르짖는 현실의 세상을
풍자하는지도 모르겠다.
엔진칸의 절대권력자 윌포드, 그가 꿈꾸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엔진, 그 돌고 도는 열차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알지만 여기서 말하면 재미 없으니 입을 다물겠다. ^^
이 장면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오래 남는다. 무더운 여름 날을 식혀주는 가장 시원한 장면이다.
개연성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주제가 신선했다. 다국적 연기자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다.
인물의 캐릭터가 분명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고 나오며,
봉감독이 세계인을 대상으로 큰일을 했다, 그런대로 괜찮은데 초반부가 너무 칙칙하고 다소 지루했다,고 했다가
옆지기와 딸의 협공을 받았다. 둘은 영화의 성격상 그렇게 되는 것이 맞다며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추켜세웠다.
연기를 정말 잘 한 외국인 배우들은 유명하다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길리엄,만이 해리포터,에서 봐온 탓인지 어디서 본 듯했다.
우리나라의 송강호, 고아성은 너무나 잘 알아서인지 그들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저절로 몰입 두 배가 되고
재미도 더 있는 것 같았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낯설지 않은 편안함도 한몫 했으리라.
주인공 혁명의 리더, 크리스가 드디어 윌포드를 만났을 때.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맞은 엔진칸에서 알게 된 것은 자신과 희생자들이
열차의 생태계 균형을 맞추려는 데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차의 성자 길리엄이 윌포드와 한 통속이었던 것도 충격이었다.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윌포드의 균형론에 설득당하기 직전
요나(고아성)에 의해 열린 바닥의 엔진쪽 공간을 보고 크리스는 경악한다.
거기에는 봉준호 감독만의 세밀함과 독특함이 숨어있었다.
진이 다 빠진 어린이가 부품처럼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 민수(송강호)와 요나는 마약의 일종인 크로놀 중독자이며 부녀지간이다.
크로놀의 노예가 된 그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지만 죽음의 공간이었던 열차 바깥세상을 깊이 관찰하고
희망적으로 보며 탈출하기로 마음먹는다.
상상력은 때로 현실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게 된 것들이 작지 않다.
그러나 보편적인 시각에서 보면 공상과학영화와 현실은 다소 동떨어져 있어 개연성이 부족하기 쉽다.
영화에서도, 웹툰 1화를 보아도, 열차는 레일 위로 달리던데
그러면 레일은 눈에 덮여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레일도 보이지 않는데 어찌 기차가 달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7년 동안 고장 없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 릴 수 있는 엔진이 과연 있을까.
이 사항은 여전히 의문점이다.
그러나 기존의 틀에 박힌 세상이 불합리하다거나 지루하고 따분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와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는 것, 이 사실만은 진리에 가깝다.
만일 영화속 얘기가 현실이 된다면 신 인류의 조상은
마지막 장면에 흰 눈을 딛고 선 요나와 흑인 아이가 되겠지. 하며 옆지기가 말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살아 움직이는 북극곰은 희망의 불씨가 되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너무나 혹독한 환경이라 생존자 두 사람이 곰의 먹이가 될 확률도 높아보였다.
결국 피라미드의 생태계 먹이사슬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정답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과 국내외 배우들, 스탭들 참으로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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