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145

사람을 소비하는 방식 / 이종섶

사람을 소비하는 방식 이종섶 친한 사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생물학적 천성이 있다 사람이 그리울 때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접촉한다 감정의 섞임과 요동을 겪는 생활은 얼마나 우스운가 오늘도 거리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낸다 카페에 홀로 앉아 사람을 즐긴다 SNS를 통해 사람과 관계한다 가까운 사람들은 서로를 소비하므로 소비되지 않는 타인만 소비하며 산다 사람을 소비하는 익명의 방식이 편안하다 이종섶 시인 경남 하동 출생.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시집 [물결무늬 손뼈 화석] [바람의 구문론]. 수상

좋은 시 2021.08.19

주름 한 권 / 권상진

다 웃지 않고 다 울지 못한 시간들 겹겹이 밀려와 굳어가는 흔적 어떤 표정으로도 활짝 펴지지 않을 때 주름은 한 권의 서사가 된다 굳이 펼쳐보지 않아도 이미 슬픈 낡은 책 한 권 그 굴곡진 줄거리 어느 부분부터는 어렴풋이 나도 아는 이야기 고향집 고샅에서 일렁이던 잔물결들이 여기 먼 객지까지 밀려오는 날이 있어 그런 밤은 마음도 눈가처럼 젖었다 마르는데 한 생 반듯하게 펴보지 못하고 끝내 못다 한 말 입가에 접어두는 이 눈가에 묻어두는 이 꼬깃하게 접었던 속엣말이 내게도 있어 속삭이듯 그 주름가에 놓아보지만 괜찮다 괜찮다며 가만히 밀어내는 온화한 파문 ♤♧ 그는 일찍 고아가 되었다고 했다. 5월도 아닌 6월에 부모님 생각이 난다고. 그러니까 주름 한 권은 부모의 부재로 쌓인 외로움의 서사다. 어디 외롭기..

좋은 시 2021.06.30

가는 것은 낮은 자세로 / 노두식

아직 오늘은 아니라고 한다 여름 몰래 관목과 이끼 낀 바위 비스듬히 기우는 쪽으로 가을이 스며들고 있다 시든 열기가 숲속을 배회하고 후회의 띠처럼 서늘하게 스쳐 가는 아쉬운 시간이 바쁘다 말간 빛의 타래가 쇠락하는 잎끝에 머물다가 바닥으로 똑똑 방울져 떨어진다 여기 동작이 느려진 곁가지들의 춤이 가사를 잃은 노래에 얹혀 있던 계절의 마지막 온기를 끊어 내고 있다 가는 것은 항상 오는 것보다 낮은 자세다 젊음이 그러했고 사랑이 그러했다 일어선 것이 엎드린 것들을 지운다 배경을 흐리며 어제의 여름이 슬쩍 다가와 머물다가 해 짧은 오후의 그림자처럼 자취를 감춘다 초록은 그리운 것들 속에 깃들어 한동안은 오히려 짙어질 것이다 그래도 아직 오늘은 아니라고 오늘만큼은 아닐 거라고 여윈 들풀이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

좋은 시 2021.05.07

개가 물어뜯은 시집 / 칠일 째 칼날 / 조경선

♤♧ 개가 물어뜯은 시집 / 조경선 우편으로 배달된 시집을 옆집 개가 물어뜯고 있다 제목은 찢겨져나갔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시 제목이 반쯤 남아 땅 위에 너덜거린다 한 끼에 9,000원짜리 독상 침 흘리고 먹다 버린 첫 장 시인의 말이 마당에 흩어져 있다 귀퉁이 구겨진 시인의 얼굴은 웃는다 시집을 먹어치운 개가 맛을 아는지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꼬리를 흔든다 배불리 먹었을까 씹어 넘기다가 맛있는 부위만 골라 핥았을까 유명한 견이니 겉장만 보고 가려서 맛보았겠지 간신히 찾아낸 이름 한 글자와 제목이 대문 앞에 적멸로 앉아 있었다 * *장인수 시집 《적멸에 앉다》인용 ♤♧ 칠 일째 칼날 / 조경선 소한의 눈발이 명부전 마당을 보름께 쓸고 있다 첫 날을 집어넣을 때 천년의 숨결을 참는다 나무는 칼날을 ..

좋은 시 2021.04.26

저녁 江 / 문정영

당신의 울음 안에는 느린 소 한 마리가 있어 긴 강둑 건너가며 울음 울듯 느린 시간 품고 있습니다 그 안에 내가 빠지면 나도 모르게 헤엄치지 못하는 아이처럼 허우적거리는데 그곳을 한참 만에 빠져나오면 어릴 적 맨몸을 말리던 냇가가 나오곤 합니다 7월 햇볕에 달구어진 조약돌 위를 작은 고추 흔들며 팔짝거린 채 뛰어가던 내가 그 울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소의 큰 눈망울에 작은 고추에 그대 맑은 울음이 겹치고 있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당신은 옛적 울음을 우는 사람입니다 서글픔으로 오래 적셔온 팔소매 걷어 젖히고 어깨선까지 훌쩍이며 울음으로 그대 등이 그렇게 둥그스름해졌지요 저문 江이 그렇게 붉어졌지요 문정영 장흥 출생. 1997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꽃들의 이별법》등. 《시산맥》발행인

좋은 시 2021.03.24

톰방톰방 은하수 건너가고 / 장하빈

저무는 호숫가 왕버들 아래 밥물 끓는가 산그늘 내려앉은 호수 위로 지친 꼬리별 하나둘 저녁밥 찾아들듯 톰방톰방 은하수 건너가는 저 맨발의 물수제비 그대는 물총새 되어 호수 속 나풋나풋 날아들고 달빛이 무장 그리운 날은 딸꾹질 소리만 수면 위로 스르르 미끄러지는데 하나, 둘, 셋···물 단추 풀어 헤치며 호수에 잠긴 달 젖가슴 봉긋이 드러났다 호숫가 자투리땅에 유채꽃 자지러지는 저녁 - 장하빈, 「톰방톰방 은하수 건너가고」 전문 시집 《총총난필 복사꽃》 시학 2019 장하빈 시인 1997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 시와시학 동인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시집 『비, 혹은 얼룩말』, 『까치 낙관』, 『총총난필 복사꽃』

좋은 시 2021.03.15

나의 아름다운 오실지 / 장하빈

저물녘 동구 밖 산책하다가 길 잘못 들어 어느 골짜기에서 너를 만났네 물동이 같고 독항아리 같은 너 행여나 수줍은 아낙이 옷고름 물고 나타날 것만 같아 해거름이면 바람이 나서 너에게로 종종걸음 놓았네 개망초꽃으로 흔들리며 살포시 다가가거나 강아지풀로 꼬리 치며 언저리를 맴돌았네 네 볼우물처럼 파인 모래톱에 발자국 새기거나 네 무릎인 양 못가 바윗돌에 걸터앉기도 했네 까치노을 물들인 네 불그레한 낯바닥을 나는 물잠자리와 소금쟁이마냥 떠다녔네 어제는 산돌림으로, 오늘은 여우비로, 내일은 모다깃비로 잔잔한 네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네 투둑투둑, 한여름이 타개지면서 난 어느새 너에게 빠져들고 말았네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잠기고 꿈속까지 물이 차오를까 봐 너는 높다란 다락방에 깃들고 싶다 했네 내 생의 아름다운 골..

좋은 시 2021.03.04

아내의 젖을 보다 / 이승하

나이 쉰이 되어 볼품없이 된 아내의 두 젖가슴이 아버지 어머니 나란히 모신 무덤 같다 유방암이란다 두 아이 모유로 키웠고 내가 아기인 양 빨기도 했던 아내의 젖가슴을 이제 메스로 도려내야 한다 나이 쉰이 다 되어 그대 관계를 도려내고 기억을 도려내고 그 숱한 인연을 도려내듯이... 암이 찾아왔으니 암담하다 젖가슴 없이 살아야 할 세월의 길이를 생명자가 있어 잴 수가 있나 거듭되는 항암치료로 입덧할 때처럼 토하고 또 토하는 아내여 그대 몇 십년 동안 내 앞에서 무덤 보이며 살아왔구나 두 자식에게 무덤 물리며 살아왔구나 항암치료로 대머리가 되니 저 머리야말로 둥그런 무덤 같다 벌초할 필요가 없다 조부 무덤 앞 비석이 발기된 내 성기 닮았다 -계간 『서정시학』 2008년 봄호

좋은 시 2021.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