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조 42

벚꽃 공약 / 백점례

저것은 부글부글 만발한 거품이다 미풍의 맑은 물에 세제를 풀어놓고 4월의 부푼 공약을 씻어내는 광경이다 불어난 허풍에 봄날이 떠내려간다 꿈속을 거니는 꽃구름 약속의 나라 몇몇이 날아오르다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나래시조》2021년 봄호 백점례 2011년 《매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버선 한 척》, 《나뭇잎 물음표》천강문학상 시조 대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나래시조 젊은 시인상, 대산문화재단 대산창작기금 수혜.

좋은 시조 2021.04.20

비비추에 관한 연상 / 문무학

만약에 네가 풀이 아니고 새라면 네 가는 울음소리는 분명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울고 말거다 비비추 비비추 그러나 너는 울 수 없어서 울 수가 없어서 꽃대궁 길게 뽑아 연보랏빛 종을 달고 비비추 그 소리로 한 번 떨고 싶은 게다 비비추 그래 네가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떨면서 눈물 나게 연한 보랏빛 그 종을 흔들면 잊었던 얼굴 하나가 눈 비비며 다가선다 오늘의시조시인회의《한국의 시조》고요아침 ㅡ 이미지는 네이버펌.

좋은 시조 2021.04.19

가스라이팅 / 이송희

가스등을 낮추면서 그는 나를 나무란다 어두워진 방문이 자꾸 나를 두드리고 퍼렇게 멍든 하늘이 심장을 울린다 어긋난 박자에 시간마저 금이 간다 확신했던 것들도 이제 믿지 못하고 잘 못 본 저녁이 오면 말수가 줄어든다 어둑해진 집 안은 늘 춥고 배가 고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배경화면 그 너머 우리는 모르는 빛깔로 섞여가는 중이다 《나래시조》2020년 겨울호 《나래시조》2021년 봄호 [지난 계절 좋은 시조 Review] 꼭지에 재수록 이송희 시인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 수상, 아르코와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 시집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외, 평론집 『경계의 시학』 외,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 그 외 저서 『눈물로 읽는 ..

좋은 시조 2021.04.15

눈보라 / 이송희

당신의 계절은 으슬으슬 추웠어 어떤 말도 하지 못한 눈발이 퍼부은 날, 빈속을 헤집고 다닌 해고 문자 알림 소리 밤새도록 휘날린 한기에 떨었지 문밖에 선 채로 눈사람이 되었다가 눈 밖으로 밀려날까 얼음이 되었다가 입안에 머금은 채 울먹울먹 삼킨 말들 가루가 된 시간들을 탈탈 털어 마셨어 아이는 집 안에서 홀로 울고 있었고 기한을 훌쩍 넘긴 독촉장을 모아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털어넣는 알약들, 흘러내린 슬픔마저 얼어붙은 밤이 가고 허공에 흩날린 꿈도 다 사라진 겨울 아침 《시조시학》 2021년 봄호 이송희 시인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 수상, 아르코와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 시집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외, 평론집 『경계의 시학』..

좋은 시조 2021.04.13

서로이웃 / 이송희

이따금 옆집에서 강아지가 짖었어요 얼굴 없는 그림자가 문 밖에 서 있나요 복도를 함께 쓰면서 바람을 공유했죠 문 앞의 택배상자엔 강아지 사료뿐 벨을 힘껏 눌러도 반응이 없더군요 일면식 한 번도 없는 달력이 넘어가요 어디선가 흘러나온 아나운서 일기예보 내일의 날씨는 구름 가끔, 흐리다네요 여전히 모르는 얼굴이 이웃추가 돼 있네요 《시조시학》 2021년 봄호 이송희 시인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 수상, 아르코와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 시집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외, 평론집 『경계의 시학』 외,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 그 외 저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

좋은 시조 2021.04.13

<해남>, <개와 달> / 최영효

'한국시조대상' 2021 수상작 외 1편 최영효 ♤♧ 땅끝 앞 돌섬 위에 저 소나무 꼴깞 좀 보소 뒤틀려 휘어져서 어덜 보고 있는감요 지금 니 거기 선채로 날 기다리고 있었구마이 그냥 칵 죽으면 될 걸 죽지 못해 살고 있지라 이 뺨 저 뺨 오지게 맞고 막판에 울러 왔지라 사는 게 끝은 있어도 까닭은 없는 게비여 끗발이 죽었분디 뭔 일이 됐것소만 잘못 만난 때는 있어도 잘못 태어난 사람 없지라 여그가 땅끝이라도 시작은 인자부터요 전문 /최영효 ♤♧ 미친 개, 달을 보고 한밤 내 컹컹댄다 내가 뭘 잘못했나 저만큼 뜬 달 멈칫 섰다 동네 개 삼이웃 불러 품앗이 합창을 한다 미친 개에 물리면 미치거나 죽는다는데 미친 개는 미친 개를 먼저 알아 물지 않고 미친놈 미친놈끼리 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물리고 물어뜯고 등..

좋은 시조 2021.04.12

완도를 가다/ 박현덕

주루룩 면발처럼 작달비가 내린다 바람은 날을 세워 빗줄기를 자르고 지하방, 몸을 일으켜 물빛 냄새 맡는다 첫차 타고 눈 감으니 섬들이 꿈틀댄다 잠 덜 깬 바다 속으로 물김 되어 가라앉아 저 너머 새벽 어장에 먹물 풀어 편지 쓴다 사철 내내 요란한 엔진 소리 끌고간 아버지의 낡은 배는 걸쭉한 노래 뽑았다 그 절창 섬을 휘감아 해를 집어 올린다

좋은 시조 2021.03.24

느시* / 박성민

노을을 뒤척이며 손톱을 물어뜯고 저녁까지 앓던 능선은 몸 돌려 눕습니다 당신도 움켜쥘 수 없는 발톱이 세 개입니까? 툭툭 튀던 심장을 깃털 속에 넣거나 따뜻하게 목도리에 비빌 수도 있습니다 누구를 닮아가는지 모를 울음을 풀어 줍니다 한 번도 나뭇가지에 앉아 본 적 없습니다 눈물이 번져가도 피어나지 않는 꽃들 당신의 이름을 잊는데 일생이 지나갑니다 *느시 : 천연기념물인 겨울새. 들칠면조라고도 함. 짧은 발가락 3개에 뒷발가락이 없어서 나무에 앉을 수 없다 계간 [다층] 2020-가을호 에서 박성민/2009년《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쌍봉낙타의 꿈], [어쩌자고 그대는 먼 속에 떠 있는가] 등

좋은 시조 2021.03.23

아니다 經典 / 최영효

천 번을 물어도 아니라고 말하는 남자 가슴에 멍이 들수록 적의를 버리는 남자 예수도 갈릴레오도 사마천도 사육신도 시집 『노다지라예』 목언예원 2014 최영효 1999년 《현대시조》 추천. 200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김만중 문학상. 천강문학상. 형평문학(지역)상. 중앙시조대상 수상. 시조집 『무시로 저문 날에는 슬픔에도 기대어서라』, 『노다지라예』, 『죽고못사는』, 『컵밥3000 오디세이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좋은 시조 2021.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