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공중전화, 드라이 아이스/김경주 꽃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 좋은 시 2012.05.26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어.. 좋은 시 2012.05.22
자화상/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애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 좋은 시 2012.04.21
가시는 생각, 오시는 생각/한영옥 저 생각이 제 몸 다녀가십니다 제 몸 고마웠다 하시며 가십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오셨습니다 가시는 생각과 오시는 생각이 제 몸 안에서 고요히 마주치셨습니다 제 몸은 여름 과실인 것 같았습니다 오시는 생각이 가시는 생각 떠밀지 않고 핥으며 수박 냄새, 참외 냄새 맡을 때 제 몸 다.. 좋은 시 2012.04.12
마음이여/이상국 마음이여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 피곤하니까 돌아온 저를 데리고 나는 자전거처럼 가을에 기대섰다 구름을 보면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가면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여 때로 세상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내가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하면 늘 알아서 하라던 마음이여 저는 늘 내가 아.. 좋은 시 2012.04.10
풀리는 강가에서/조향순 풀리는 강가에서 왜 벌써 용서하려구 조금만 더 얼어주면 안되겠니 조금만 더 미워해주면 안되겠니 꽁꽁 얼었을 때가 얼마나 좋아 사랑했으니까 꽁꽁 얼었지 젊었으니까 꽁꽁 얼었지 용서는 사랑이 아주 끝날 때 오는 것 바보야 바보야 그러니까 우리 사랑이 끝난 거야 우리 청춘이 가는.. 좋은 시 2012.04.06
얼레지/할미꽃/봄날 오후/포구의 방...김선우 김선우 시인의 시 몇 편 감상해 보세요. 이 시들은 2012년 이전에 나온 것들인데 어때요? 女와 餘(여)를 전공한 것 같나요? 과감하고 거침없이 그러나 나직하게 독백하듯이 솔직하게 쓰기도 하는 것 같아요. 얼레지/김선우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 좋은 시 2012.04.02
넥타이/임영조 이른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 목을 맨 올가미가 온종일 나를 끌고 다닌다 사무실로 거리로 찻집으로 술집으로 또 무슨 식장으로 끌고 다닌다 서투른 근엄을 위장해 주고 더러는 나를 비굴하게 만들고 갖가지 자유를 결박하는 끈 도대체 누굴까? 이 견고한 줄로 내 목을 거뜬히 옭아 맨 .. 좋은 시 2012.03.21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함민복 여보시오 --- 누구시유 --- 예, 저에요 --- 누구시유, 누구시유 --- 아들, 막내아들 --- 잘 안들려유 --- 잘, 저라구요, 민보기 --- 예, 잘 안들려유 --- 몸은 좀 괜찮으세요 --- 당최 안들려서 --- 어머니 ---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 두 내우다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 예, 죄송합.. 좋은 시 2012.03.01
외곽의 힘 2/문성해 도시의 외곽으로 화훼단지가 펼쳐져 있다 견고한 비닐하우스 아방궁 속에서 천적도 없이 비대해진 꽃들이 사철 피어 있는 그곳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외곽에서 총이나 대포가 아닌 꽃들이 쳐들어 온다는 것, 트럭을 타고 꿀과 향기로 중무장한 그들이 아침마다 톨게이트에 진을 .. 좋은 시 2012.02.18